“해외 수주하러 갔더니 왜 왔냐 면박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최근 주요 발주처인 그리스와 이란 등에 출장을 갔더니 선주들이 ‘사정을 뻔히 알 텐데 왜 왔느냐’는 말을 하더군요.”

중견 조선업체 영업 담당인 A상무는 지난달 중순 신규 수주를 위해 출장을 갔다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요즘 바늘방석이라고 했다. 명색이 영업 상무인데 지난해 10월 이후 단 한 척의 배도 수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도 사정이 워낙 안 좋은 것을 알고 있기에 서로 아무 말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밤에 편히 잘 수가 없다고 한다.

‘나는 (수주를) 못하고 있는데 혹시 다른 경쟁업체에서는 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한다. 이 회사는 현재까지 150여 척을 수주해 놓은 것이 있어 향후 3년 정도의 일감은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수주 부진이 계속된다면 곧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그는 “외환위기 때는 해외 수주는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은 주문 자체를 하지 않으니 별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해외 선주들이 보통 배 값의 20% 정도를 자체 돈으로 조달하고 나머지는 선박 금융을 이용하는데 세계적 금융위기로 조선시장이 꽁꽁 얼어붙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회사뿐이 아니다. 이른바 ‘조선 빅3’로 불리는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도 올 들어 수주가 거의 없다.

삼성중공업만 1월에 9000억원짜리 배 한 척을 수주했을 뿐이다. 최근에는 선박 인도 연기까지 줄을 잇고 있다. 현대중공업의 최길선 사장은 최근 “지난해 하반기부터 신규 수주가 전무하고 기존 수주 물량도 지불 연기, 인도 지연 등의 요청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쉬쉬하며 공개하지는 않지만 발주 취소도 적지 않다는 게 A상무의 귀띔이다. 배 값도 떨어지고 있다. 선박 가격 수준을 나타내는 클락슨 선가지수는 지난해 9월 190에서 올 2월 말 현재 159까지 떨어졌다.

A상무는 “예전에는 특정 업체의 수주 가능성이 높을 경우 경쟁업체가 가격을 내려 입찰하는 ‘비신사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조선업계 사정이 워낙 어렵다 보니 앞으로는 신규 발주가 어디에서건 나오면 신사적인 수주가 될지 의문일 정도”라고 말했다. 국내 업체 간 치열한 저가 입찰 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조선업체들은 비용 절감과 생산성 향상으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최고경영자(CEO)의 임금을 전액 반납했다. 다른 업체들도 생산성 향상과 각종 비용 절감으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전략이다. 삼성중공업은 전 임원의 급여를 10~20% 삭감하고 대대적인 원가 절감 운동을 벌이고 있다. 물자를 30% 절약하고 업무효율은 30% 향상시키자는 3030운동도 벌이고 있다. STX조선은 최근 사명을 STX조선해양으로 바꿨다. 신규 선박 수주가 부진한 가운데 그나마 사정이 좋은 해양 플랜트 분야를 강화하겠다는 포석이다.

염태정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