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드는 즐거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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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호 12면

출판기자인 만큼 일주일에 100권 이상의 책을 봅니다. 물론 여기서 ‘본다’ 함은 읽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보는 겁니다. 독자들에게 소개할 책을 고르기 위해 제목과 저자, 머리말, 해설, 목차와 주요 내용 등을 살피는 거죠. 그런데 기사가 나간 뒤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드물지만 ‘왜 이 책을 빠뜨리고 기사를 쓰지 않았지’ 하는 자책감이 들 때입니다.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합니다.

김성희 기자의 BOOK KEY

『나이는 생각보다 맛있다』(김혜경 지음, 글담출판사)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낯선 저자, 단순한 표지, 잘나가는 중년 여성들의 자기 자랑이란 인상을 주는 제목, 젊은이들을 겨냥한 듯 톡톡 튀는 본문 디자인을 보고 더 ‘긴요한’ 책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게 2주 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이 책을 읽고는 얼굴이 뜨뜻해졌습니다.

책은 마흔여덟의 여성 광고인이 일상에서 겪은 느낌·일화를 그린 에세이입니다. 노후 대비 재테크 책도, 나이가 벼슬이라 우기는 ‘노년 찬가’도 아닙니다. 그런데 묘하게 읽는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나름 치열한 삶, 잰 체 않는 소탈함, 주변의 소소한 일을 허투루 넘기지 않는 시선 덕분입니다.

“누군가 가장 무서운 암이 ‘비교암’이라 했다. 남들보다 아파트 값이 더 올라야 하고, 남들보다 더 비싼 차를 타야 한다는 도시의 잣대에서 벗어나니 한결 삶이 가벼워졌다.”

“쓴맛이 좋아지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란다. 요즘 나는 쓴맛 좋아진 내가 맘에 든다. 인생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느긋해졌다는 의미니까.” 이처럼 ‘잠언’에 가까운 구절이 곳곳에서 반깁니다.

그는 본인 입으로 얘기하듯 부모 잘 만나 공부도 웬만큼 했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고, 억울하게 생긴 것도 아닌 보통 중년입니다. 아니, 사회생활 하는 며느리를 위해 17년째 도시락을 싸 주는 팔순의 시어머니, 속 깊은 남편·아들이 있는 ‘복 받은 아줌마’입니다. 당연히 그의 글은 심오하지도, 진지하지도 않고 깊은 성찰이나 극적인 요소도 없습니다. 대신 솔직함이 글을 빛나게 합니다.

대학생 때 노동자들의 의식 개조 활동을 위해 위장 취업했지만 되레 육체노동의 건강함에 눈떴다든가, 그때 두 달간 번 4만5000원으로 기타를 사 버린 일을 털어놓습니다. 또 아홉 남매 중 막내딸임을 “이렇게 눈치 말짱하고 웬만한 일에는 눈도 꿈쩍 않는 배짱도 없었을 거”라며 기꺼워하고, 사회생활 24년 동안 정장 한 벌 없이 버틴 이유가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옷보다는 어울리는 옷을 입는 게 중요하다고 믿어서라고 단순한 이유를 댑니다. 씩씩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래, 잘났어 정말”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건이 좋다고 다 지은이처럼 살 수는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은이가 그랬습니다. “난 나이 드는 게 좋다. 나쁜 것, 싫은 것, 무난한 것, 이런 것들을 포용해 주는 것, 그것이 나이 먹음의 미학이 아닐까”라고.

책에는 지은이가 만난 광고계 여성 8인의 이야기도 담겼습니다. 책에 나온 대로라면 하나같이 만나보고 싶은 인물들입니다. 지은이가 “글도 그림도 더 나아가 인생도 똑같다. 꾸미고 덧칠할수록 추해진다”고 했으니 어련하겠습니까마는. 김재옥 연세대 객원교수 편에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위 사람들과 다르게 늙는다고 해서 잘못 늙는 건 아니다.”

가슴에 와 닿더군요. 비단 늙는 것에만 이런 각성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경력 27년차 기자로 고려대 초빙교수를 거쳐 출판을 맡고 있다. 특기 책 읽기.『맛있는 책읽기』등 3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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