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을숙도 갈대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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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해말 세상을 떠난 소설가 김정한 (金廷漢) 씨가 26년의 긴 침묵을 깨고 '모래톱 이야기' 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한 것은 66년이었다.

이 소설의 무대는 '섬의 생김새가 길쭉한 주머니 같다 해서 조마이섬이라 불리는' 낙동강 하류의 어떤 섬이다.

작품 속의 섬과 섬마을 사람들의 거친 삶이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조마이섬은 부산시 사하구의 을숙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을숙도의 수난사와 섬을 지키려는 마을사람들의 거센 저항을 다룬 비극적 리얼리즘의 이 소설로 인해 金씨는 '낙동강의 파수꾼'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을숙도는낙동강이 운반해온 미세한 토사 (土砂) 의 퇴적에 의해 형성된 모래섬이다.

해발 1 이하의 평지로 물길이 미로처럼 뻗어 있으며, 이 물길을 따라 2~3 높이로 생육하는 갈대밭이 장관 (壯觀) 을 이룬다.

하지만 이 섬을 더욱 유명하게 하는 것은 동양 제1의 철새 도래지라는 점이다.

그래서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된 낙동강 하류 철새 도래지에 속해 있다.

이곳을 찾아드는 철새는 1백38종에 10만마리가 훨씬 넘는다고 한다.

황새.저어새.재두루미 등 희귀종들도 많다.

겨울철에새들이 군무 (群舞) 를 이루며 비상 (飛翔) 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철새의 대부분은 겨울새지만 여름철에 날아드는 여름새도 있고, 봄.가을철에 잠시 쉬다가 가는 나그네새도 있다.

새들은 을숙도의 갈대밭을 어미새의 품속처럼 느끼는 듯 부드럽게 흔들리는 풍성하고 아늑한 갈대밭 속에서 서로 깃털을 부딪치며 사랑스런 몸짓들을 하는 것이다.

'모래톱 이야기' 는 을숙도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4백여명의 주민이 각종 채소와 땅콩 따위를 재배하며 살고 있었으나 동서로 횡단하는 낙동강 하구둑이 완공되면서 모두 육지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고향' 을 꿈에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부산시 사하구청이 유채꽃단지를 만든다는 이유로 일부 갈대를 베어냈다니 시끄럽지 않을 리 없다.

즉시 단지조성 공사를 중단하고 문화재관리국에 현상변경 승인신청을 내 복구 조치를 취한다지만 자연 경관 (景觀) 을 해치는 일에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갈대밭이 일부라도 훼손돼 철새들이 찾아들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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