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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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 듣겠군요. 말씀을, 아니 알고싶은 내용이 뭔지를 정확히 물어 주세요. 그럼 분명하게 대답해 드리죠. "

오기욱의 엉뚱한 질문을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없이 냉랭한 어조로 되받아쳤다.

"내 질문에 여러가지 뜻이 내포된 것 같다, 그런 말이요?"

"모르시겠다면 제가 정리해 드리죠. 정말 피디가 맞냐는 질문은 제가 피디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피디의 생김새가 정형화돼 있다는 뜻인가요? 그도 저도 아니면 제가 신분을 위장하고 피디로 행세하는 사기꾼처럼 보인다는 뜻인가요?"

"세가지 다 아니요. 내가 알고싶은 것은 오직 한가지, 이예린씨가 정말 피디인가 아닌가하는 것뿐이요. 난 극도로 단순하게 물었는데, 얘길 듣고보니 사유 구조가 상당히 콤플렉스형인 것 같군요. 단순한 질문엔 단순한 대답이 가장 적절한 것 아닌가요?"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는 의도적으로 이예린에게 약을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쳐놓은 그물에 그녀의 요체가 걸려들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런 대답이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런 궁금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그런건 오선생님의 소설에 나오는 대화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테니까요. "

"내 소설?"

자세를 고쳐앉으며 오기욱은 순간적으로 긴장하는 표정을 보였다.

"알아서 무엇하나, 지나가는 인연이려니… '붕새' 라는 단편소설에 그런 구절이 있었죠. 본인이 직접 쓰신 건데, 기억나지 않으세요?"

꼿꼿한 자세로 이예린은 오기욱을 노려보았다.

"흠, 엉뚱하게도 내가 놓은 덫에 내가 치이게 되는군. "

피우던 담배를 재털이에 비벼끄며 오기욱은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때까지와 달리 아주 흔쾌한 표정으로 이예린을 건너다보며 또다시 엉뚱한 말을 했다.

"이예린씨와 대화를 하니까 기분이 무척 좋아지는군요. 이런 스릴은 참 오랜만인데…. 두분이 약속을 하셨다니 난 이쯤에서 그만 물러나죠. 하지만 두 분이 얘기를 나누다 무료하거나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 때나 연락하세요. 술 한잔 사고 싶군요. "

말을 하고 나서 그는 담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나에게 시선을 주며 미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 아니면 어디죠?"

"여기, 아니면 '잃어버린 지평선' 이지 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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