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이 된 스님 전승룡의 인생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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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승복을 벗어 던진 모델 전승룡(23)씨와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시간을 내줘 고맙다.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인가.

"집에서 전철을 타고 왔다. 내겐 집이 바로 절이다. 절은 내가 태어난 곳이고 부모님이 계신 집이다.”

-요즘 마음은 어디 있나.

(잠시 두리번거린 후)“바로 여기 있잖은가.”

-지금 그 마음이 뭘 간절히 바라나.

“다리가 더 늘씬하게 길어지고 얼굴이 좀 작아졌으면 한다. ”

-마음에 고통스런 부분은 없나.

“중 노릇을 끝까지 못한 점 딱 하나 죄스럽다. 그냥 파계 선언을 하고나면 끝인 줄로만 알았는데 며칠전 조계종에서 연락이 왔더라. 서류상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보내라고 그랬다. 다시 마음이 혼란스럽다.”

-왜 파계의 길을 걸었나. 아직도 그게 고통으로 맴도는데….

“어느 날 수도와 정진만으로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 거라는 엉뚱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깨달음이 약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성불(成佛)을 못할 것 같은…. 그래서 세상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패자(敗者)로서의 비애는 남아 있는 셈이다. ”

-삶의 목표는.

“톱 모델이 되는 거다. 톱! 화려하다. 여기서는 결코 지지 않을 것이다. ”

-10년 뒤의 모습을 그려본 적이 있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잠시 생각하더니)아마 거지가 돼 있을 것 같다. 초라한 거지 말고 멋진 거지…” 왜 하필이면 거지일까. 잠시 얘기를 멈췄다. 아무 생각없이 산다는 신세대 젊은이와 대화를 나눈 것인가. 아니면 선문답(禪問答)인가. 야릇한 흡인력을 가진 남자, 전승룡. 문득 그의 지난 날이 궁금했다. 74년 인천 가좌동 소재 철마사에서 조계종단에 있다가 범륜종으로 바꾼 주지 해광(76)스님의 늦둥이로 출생. 부평고 1학년 재학중 자퇴. 16살 나이로 속리산 법주사로 출가해 불제자의 길로 들어 섬. 21살에 환속. 이후 세상구경을 하다가 이듬해 입영. 반년만에 기관지염으로 제대. 지난해 8월 모델라인 43기로 입문. 올들어 본격 모델활동.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너의 선택에 후회가 없어야 한다. 어딜 가더라도 거짓말과 도둑질을 삼가라. ”어머니의 한마디 보탬.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절대 울리지 마라.”뻔한 주문 같기도 하고 속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듯도 하다. 대화는 다시 이렇게 이어졌다.

-왜 하필 모델이었나. 인기직종이라는 붐에 편승한 것 아닌가.

“전혀 몰랐다. 우선은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분야…신체조건(자신의 명함에 키 1백84㎝ 체중 68㎏으로 표기)을 살리기에 적합한 일자리를 찾은 것에 불과하다. 여기도 엄격한 규율이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자유로움이 통한다. ”

-튀는 것에 대해 유난히 집착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모델은 무대 위에서만 모델이 아니라 거리를 걸을 때도 그래야 한다고 여겼다. 일단은 남의 시선을 끌어당겨야 성에 찼다. 설사 그게 잘못됨에 대한 비난일지라도…. 미니스커트도 입었고 어떤 땐 팬티 같은 차림으로 거리를 쏘다녔다. 혀를 뚫자고 나섰는데 누가 말려서 포기했다. 배꼽만 뚫어 찌를 했다. 정형화된 틀 속의 나를 생각하면 끔찍하다.” - 시선이란 게 뭔가.

"제각각의 표현행위다.

시선을 받는 차림과 그것을 쳐다보는 것 모두…그게 모여서 패션이 되고 그게 모여 발전이 된다."

- 마구 튄다고들….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 자신도 짧은 시간동안 막 바뀐다.

요즘은 어느 선상의 '튐' 을 생각 중이다.

범위 내에서 튀기. 하지만 순간적인 착상을 살려 직접 옷을 디자인하고 옷감을 뜨는 것등은 의미있는 일 아닌가."

그에겐 신세대로서의 가벼움과 한때 불제자의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서의 차분함이 함께 묻어났다.

아마도 지난 5월 패션 디자이너 장광효씨의 '카루소 패션쇼' 에서 무명의 신인모델 전승룡이 눈길을 사로잡은 것도 그런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전문가들은 '오리엔탈 무드' 라는 말을 들이댄다.

- 오리엔탈 또는 얇은 몸매에서 살아나는 거침등의 평가에 대해선. "몸매가 다소 여성적이라고 그런다.

하지만 나는 거친 표정과 동작을 연출하는, 예컨대 외국의 컨테이너 트럭 운전수 같은 이미지를 풍기고 싶다."

- 모델로서의 철학을 생각해봤나.

"철학, 너무 거창하다.

아방가르드.신비주의 같은 게 마음에 끌린다.

인도 (印度) 적인 것도 느낌이 좋다."

- 수많은 지망생들을 보면….

"나름의 길을 걷고자는 하는 것일 게다.

누구도 관여.조언할 성질이 아니다."

- 본인은 지금 뭐가 부족한가.

"나의 학창시절은 공부와 거리가 멀었다.

틈만 나면 팔.다리가 없는 남녀 몸뚱어리 그림을 그렸던 기억 뿐이다.

이제는 코디와 음악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다.

성적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 편안할 것 같다.

분위기에 자연스레 휩쓸려야 연기가 산다.

실험성이 강한 코디와 '테크노' 음악 쪽에 많이 쏠리고 있다."

구도의 길은 절 바깥에도 분명 있을 터. 남의 시선을 붙들기 그리고 톱으로 달리기. 속세의 전승룡에게서 그것은 바로 구도행위다.

'피그말리온 효과' 라고도 불리는 '자기충족의 예언' 을 거론하면 어떨까. 상아로 된 조각 여인상과 사랑에 빠졌던 그리스 신화 속의 키프로스 왕 피그말리온. "저 여인을 내 아내로 삼고 말리라. " 여신 아프로디테는 조각의 여인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피그말리온의 예언을 실현시킨다는 얘기 말이다.

철마사라는 이름의 집. 그곳에선 그의 과거와 현재가 살아 숨쉰다.

신도들은 그를 법명대로 '용담 (龍潭) 스님' 또는 '작은스님' 이라 부른다.

좀 짓궂은 신도들은 아예 '젊은 오빠' .그런데 요즘은 '큰스님' 인 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다.

자주 화를 내시고 자꾸 주무시기만 한다.

눈을 감는 연습으로 생각하기엔 가슴이 아프다.

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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