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살아있는 日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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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제 (日帝) 의 패망으로 얻은 거룩한 광복의 날에 '군사적인 일본' 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외면할 수 없다.

그 현실이란 냉전종식후 동북아시아에 등장하는 새 질서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가 일본이 경제대국에서 정치.군사대국으로 비약적인 변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지난 반세기 동안 미.일 (美日) 안보체제의 우산 아래 '안보 무임 (無賃) 승차' 를 하는 여유를 이용해 거부 (巨富) 를 쌓았다.

일본은 그 경제력으로 범세계적으로 후진국에 정부원조 (ODA) 를 제공하면서 '산타 클로스' 의 이미지를 축적하고, 특히 원조의 많은 몫을 동남아지역으로 돌려 주변관리를 해 왔다.

과거의 만행을 사과하라는 한국의 거듭된 요구를 일본이 묵살할 수 있는 것도 원조로 포섭해 놓은 나라들의 무언 (無言) 의 지지를 믿기 때문이다.

이런 착실한 터닦기를 배경으로 일본은 21세기 초반에 화려한 정치.외교적 업적 두 가지를 이루려고 한다.

하나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시아.태평양지역, 특히 동북아시아에서 명실 (名實) 이 일치하는 지도국가가 되는 것이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면 일본은 정치적으로도 미국과 함께 세계적으로 으뜸국가의 지위를 확보한다.

태평양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이루지 못한 것을 경제의 힘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아시아지역의 '맹주' 가 되겠다는 일본의 공세는 더욱 가시적이다.

경제적으로 눈부신 성장를 거듭하고 있는 중국이 다음 세기에는 군사적으로 이 지역의 안정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가능성, 그리고 안개속에 싸인 한반도사태가 일본에 확대된 군사적 역할의 길을 열어 주고 있다.

그 가장 구체적인 표현의 하나가 미.일방위협력에 관한 지침 (방위가이드라인) 이다.

9월 하순까지 확정될 지침은 주변지역의 유사시 (有事時)에도 일본자위대가 미군의 군사작전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기뢰제거.해상선박 검색.병력과 군사물자 수송등 준 (準) 작전행동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걸프전쟁때 사우디의 참전수준이 일본이 앞으로 동북아시아에서 담당할 군사적 역할의 모델이다.

그때 사우디는 다국적군대의 자격으로 육군 2개사단을 전투에 참가시켰다.

후방지원으로는 이라크가 부설한 기뢰제거를 위해 잠수요원을 동원했다.

미군 54만명은 사우디의 기지에서 사우디의 통신.수송.의료지원을 받으면서 전투에 발진 (發進) 했다.

일본은 F - 15 2백대, F - 4 1백대, F - 2항공기와 이지스함 (艦) 을 보유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 미군이 개입하고 있을 때 이런 파괴력을 가진 일본이 팔짱만 끼고 있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현실인식이 방위지침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지난 반세기 동안의 경제동물이라는 구각 (舊殼) 을 벗고 새로운 일본으로 21세기를 맞을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

문제는 그 새로운 일본이 1945년 이전 제국주의 일본 모습의 일부를 닮아 간다는데 있다.

일본은 과감하게 과거를 미화 (美化) 하고 과거에 대한 사과문제에서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8월9일 나가사키 (長崎) 시장이 원폭의 날 행사에서 평화선언을 할 때 지난 7년간 계속했던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들에 대한 사죄를 빼버린 데서도 일본의 시대역행 (逆行) 을 읽을 수 있다.

전범 (戰犯) 재판에서 살아남은 A급전범들이 영웅 (英雄) 으로 추앙된다.

이렇게 많은 일본인들의 의식이 일제로 회귀 (回歸) 한다.

일제의 완전한 죽음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일본이 아니면 아시아에서 환영받는 이웃나라는 될 수 없다는 변증법을 일본은 모르는 것 같다.

일본에는 세계적으로 통하는 문화적 상식 (cultural literacy) 이 없어 보인다.

이것이 공소시효 없이 지금도 나치전범을 추적하고 처벌하는 독일과 일본의 문화적.도덕적 수준차다.

모두가 편하게 사는 아시아를 위해 안타까운 일이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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