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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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아, 난 잠깐 올라갔다 올게. 차를 갖다 두고 와서 편하게 마시려구. 그러니 내가 다녀올 동안 이 아가씨 좀 잘 보살펴 줘. 오늘이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니까 평상시처럼 얼렁뚱땅 대하지 말고 특별하게 대해 달라 이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 알아서 하라는 표정으로 나는 오른손 검지를 곧추 세워 정마담을 겨냥했다.

"아니 내가 언제 하영씨를 얼렁뚱땅 대했다는 거지?

그리고 스물여섯 번째 생일은 또 뭐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마담은 나를 보고 이어 하영을 보았다.

"그건 내가 다녀올 동안 여기 앉아 있는 이 공주님에게 물어봐. 그럼 인생을 새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될 거야. 뿐만 아니라 오늘의 운세 같은 것으로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일도 없게 될거야. " 가볍게 손을 들어보이고 나서 나는 밖으로 나왔다.

불과 몇 분밖에 지나질 않은 것 같은데, '잃어버린 지평선' 으로 들어갈 때보다 날빛이 훨씬 어둑어둑해진 것 같았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다 차를 주차시키고 일층으로 올라와 오기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닐곱 번 쯤 신호가 간 뒤에야 비로소 그는 전화를 받았다.

"도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전화를 이리 늦게 받아?" "발코니에 누워 있었어요. " 하루종일 말을 하지 않은 듯 그의 성대는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발코니에 누워서 뭘해?" "그냥…. 오후 내내 그러고 있었어요. 별달리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어서 송장처럼 조용히 누워만 있었어요. " "그럼 술이나 한잔 하지 그래. " "술요?" 술을 한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갑작스럽게 한 옥타브쯤 높아진 목소리로 그는 되물었다.

"사실은 오늘이 하영이 생일이야. 그래서 낮에 식사하러 장흥에 갔다가 지금은 정마담집에 와 있어. 차를 갖다 두려고 잠깐 올라온 거라구. " "그럼, 그냥 내려 가요. 지금 내 기분이 남을 축하하는 자리에 갈 만한 상태가 아니거든요. 괜히 이런 기분으로 내려가서 다른 사람 기분까지 어색하게 만들고 싶진 않네요. 그냥 혼자 있을 테니 내 걱정일랑 접어 두고 하영씨와 즐겁게 지내고 와요. 이러고 있다가…. 그래요, 혹시라도 마음이 변하면 내려 갈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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