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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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하영과 내가 '잃어버린 지평선' 에 당도한 건 저녁 일곱시 이십분 경이었다.

장흥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그곳으로 가자는 제안을 했던 것인데, 그것이 그리 흔쾌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모양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그럼 가볍게 마셔야해요" 하고 단서를 달며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 번 술잔을 들면 침잠하듯 한자리에 오래 붙박이는 나의 술버릇을 우려해서 덧붙이는 단서 조항이 결코 아닌 것 겉았다.

자기 생일의 나머지 시간을 나와 단 둘이 오롯이 보내고 싶다는 은밀한 감정의 다른 표현 - 그녀가 나의 오피스텔이나 자신의 아파트로 가고 싶어한다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 참, 오늘의 운세가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군. " 하영과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수반에다 꽃을 꽂고 있던 정마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왜, 보기 싫은 사람이 나타나서 오늘의 운세가 꼬인대. " 바 앞에 놓인 높은 의자를 끌어내 하영을 앉게 한 다음, 나는 선 채로 정마담에게 이기죽거리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 이것 좀 봐. 말하는 걸 들어보니 더욱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것 같네. " 보라빛 수건으로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정마담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하영을 보았다.

"그러니까 정말 궁금해요. 오늘의 운세가 저하고도 무관한 게 아니라는 뜻이죠?" 바 위에다 핸드백을 올려놓고 나서 하영이 물었다.

"좋아, 우리 하영씨가 궁금해 하니까 뜸 들이는 일을 이쯤에서 그만두지. 신문에 난 오늘에 내운세는 이런 거였어. 동료의 협조로 소득을 올리고 대접을 하려다 오히려 대접을 받는다…. 어때 이 정도면 오늘밤에 내게 기분 좋은 일들이 일어날 만 하겠지?" 갸름한 얼굴에 인생의 관록이 깃든 듯한 눈웃음까지 지어보이며 정마담은 하영에게 동의를 구했다.

"이거야 정말, 아전인수의 극치로구만. 이것 보라구, 신문에 난 거라면 보나마나 오팔년 개띠의 운세일텐데 그것이 정마담에게만 적용된다는 보장이 어디있어?

나두 같은 띠라는 걸 잊은 거야?

역으로 말하면 그것이 오늘밤 내 운세가 될수도 있다구. 들어보니 잘만하면 공짜술 마시게 될지도 모르겠군. " 기분좋은건 오히려 나라는 표정으로 나는 정마담을 보았다.

"이런, 이런…. 천기를 잘못 누설했구만. 지금까지는 운세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간을 잘 보내고 있었는데, 여기서 한 순간에 꼬여 버리네. 근데 왜 그렇게 있는 거지?" 수반을 바 끝쪽으로 옮겨놓고 나서 바짝 약이 오른 표정으로 정마담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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