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마음 뒤흔드는 ‘귀여운 마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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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만나뵙게 돼 영광입니다.”
감사 인사가 절로 터졌다. 시청률 30%를 넘어서며 ‘구준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KBS-2TV 드라마 ‘꽃보다 남자’(이하 ‘꽃남’)의 이민호(22). 생방송을 방불케 하는 촬영 일정 탓에 별도 인터뷰를 신청하고 기다리길 꼬박 4주. 회유와 설득, 좌절과 인내 끝에 6일 밤 마침내 ‘알현’할 수 있었다. <중앙일보 2월 9일자 20면> 인터뷰 끝나고 기념사진 찍을 땐 찌릿한 행복감마저 느꼈으니, 스물두 살 신인배우 앞에서 너무 저자세 아닌가?

“콩이 엄마, 육아에 전념해 주세요.” 어느 동료 기자가 부탁한 사인 문구다. 두 살배기 딸을 둔 그는 아내가 ‘꽃남’에 빠져 딸이 보채도 돌보지 않는다고 서운해 했다. 당연히 구준표(혹은 이민호)는 눈엣가시다. 타고난 재벌에 승마·골프·사격·검도 등 못하는 스포츠가 없고 훤칠한 외모에 ‘옷발’까지 끝내주니, 대한민국 평균 남자 입장에선 손발이 오그라들 일이다.

물론 이 ‘완벽남’은 판타지의 세계에 있다. 이민호가 기여한 것은 선이 뚜렷한 외모와 익살스러운 연기뿐. 배우 이민호에게 사인을 받아간들, 재벌 2세 구준표와는 별개의 일이다. 그래도 콩이 엄마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데 어쩔쏘냐. 그러는 남자들은 이영애가 진짜 산소 인간이라고 믿어서 열광했나. 판타지니까, 어차피 이룰 수 없는 꿈이니까, 그러려니 할 일이다. 이민호조차 “준표에게 질투를 느낀다”지 않는가.
“까칠한 듯해도 인간적인, 완벽한 남자”라는 사실에. 대한민국 여자들이 반한 바로 그 매력에.

‘신데렐라 로맨스’의 새로운 접근
‘까칠한 듯해도 인간적인 재벌 2세’는 드라마 ‘꽃남’을 일찌감치 궤도에 올려놓은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는 사고방식의 츠카사(일본 원작 만화의 주인공)는 구준표에게 와서 강도가 훨씬 약해졌다.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요즘 드라마 트렌드에 맞춰 방송 5회 만에 여자친구 금잔디(구혜선 분)에게 수줍은 순정을 보였다. 여성 시청자들은 재벌 2세에게 꿀리지 않는 여주인공을 응원하며, 티격태격 로맨스에 빠져들었다.

사랑을 모르는 재벌 남자와 씩씩한 서민 여자는 대부분의 로맨스물이 취하는 캐릭터 공식이다. SBS ‘파리의 연인’(2004), KBS ‘풀하우스’(2004), MBC ‘내 이름은 김삼순’(2005)부터 MBC ‘궁’(2006), ‘커피 프린스 1호점’(2007)까지 로맨스물의 남녀 관계는 궁극적으로 계급의 한계를 뛰어넘는 판타지에 기댄다.

그런데 ‘꽃남’의 특기할 점은 재벌 연인의 눈에 비친 ‘새로운 세상’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최고급 유람선·전용기를 굴리며 남태평양 휴양지를 이웃집인 양 드나드는 재벌 2세에게 멸치조림·자판기 커피는 초현실적 경험이다. 자신의 화장실보다 작은 방에서 잔디네 가족이 함께 자는 걸 경이롭게 바라본다. 포장마차 어묵을 먹어보고선 다른 F4 멤버들에게 “너희들이 인생을 알아?”하고 으쓱대기도 한다. 대부분의 신데렐라 로맨스에선 여주인공의 눈에 비친 상층계급의 별세계가 강조됐지만, ‘꽃남’은 그 반대의 풍경을 코믹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극단적으로 표현된 이런 장치들이 겨냥하는 것은 명확하다. “사람의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여주인공의 확신에 남주인공이 물들어 가는 과정이다. 연애의 기초를 배우면서, 남자는 인간다움의 본질을 깨닫는다. 이는 곧 로맨스물의 정석이기도 하다. 결핍을 몰랐던 남자를 여자의 세계에 초대함으로써 존재를 완성시키는 것, 그것이 여자들이 꿈꾸는 판타지의 요체다.

가부장의 권위는 뺀 ‘나쁜 남자’
재벌 남자와 서민 여자라는 결합은 양성 평등의 입장에선 퇴행적일 수 있다. 여자들은 “드라마를 통해 팍팍한 현실을 위로받는다”며 정당화하지만, 멸치조림·자판기 커피·포차 어묵으로 점철된 현실의 남자들로선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자들은 말로만 남녀 평등을 외치지, 결국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나오는 까닭이다.

그런데 ‘꽃남’에서 주목할 점은 ‘백마 탄 왕자’의 왕자답지 않음이다. 기사도는커녕 툭하면 여자 멱살을 쥐고 흔들고, 폭력과 ‘왕따’를 서슴지 않는다. ‘38계 줄행랑’ 같은 황당한 문자를 구사하는 어수룩한 면이 있다. 요즘 드라마의 ‘나쁜 남자’ 계보를 잇지만, 그렇다고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처럼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마초는 마초지만 어딘가 어설프고 천진한 마초다.

이민호라는 배우에 의해 구현된 ‘천진한 마초’는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남성상을 보여준다. 남자다운 카리스마를 지녔으되 전통적인 가부장의 권위는 쏙 뺀, 챙겨주고 보듬어줘야 할 ‘귀여운 망아지’ 같은 이미지다. ‘신데렐라 콤플렉스’ 속 왕자님이 실은 보완해 줘야 할 결점투성이라는 것은 ‘평강공주 콤플렉스’와 만나 특히 누님들에게서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판타지가 현실로부터의 도피이자 현실의 반영이라면, ‘구준표 신드롬’은 2009년 현재 여성들이 어떤 남성상에 결핍을 느끼는지 과장된 방식으로 일러주고 있다.

강혜란 기자, 사진 김성룡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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