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기행] 7.고래사냥-양양군 남해항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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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나도야 간다.

젊은 세월을 눈물로 보낼 수 있나. 나도야 간다.

사랑찾아 나도야 간다…" 70, 80년대 청춘을 보낸 사람이라면 고래사냥이라는 잠재된 꿈의 표상을 기억할 것이다.

'바보들의 행진' (75년)에 이어 '신화처럼 숨을 쉬는' 동해의 고래를 잡겠다는 동시대 젊은이의 방황을 현실보다 더 절절하게 보여주었던 영화 '고래사냥' (84년 최인호원작.배창호감독) . 대학생 병태 (김수철扮)가 거지 (안성기扮) 와 함께 창녀촌의 춘자 (이미숙扮) 를 탈출시켜 데려다준 그녀의 고향 '우도' 는 다름아닌 동해안이었다.

삭풍에 떨며 시골길을 걷다가 경운기.트럭을 얻어타고, 또다시 산길을 넘어 석탄화차를 훔쳐타고는 마침내 닿은 곳이 남애항. 3인은 막 기지개를 켜고 있는 동해바다에 탄가루 묻은 얼굴을 씻어내고는 어린애처럼 일출에 붉게 물든 모래밭을 이리저리 내달린다.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남애리. 주문진 북방 4㎞. 배창호감독은 주문진보다 한적한 항구를 찾던 끝에 이곳을 선택한다.

촬영팀은 추울 것만 같은 겨울바다를 먼거리 촬영 (遠寫) 으로 따뜻하고도 살갑게 살려낸다.

3인은 남애항 부두 위판장에서 자전거를 훔쳐타고 양양~주문진 국도를 달린다.

가도가도 지루하지 않은 동해안 국도 7호선. 고래떼가 물을 뿜으며 다가올 것처럼 망망대해가 눈앞에 펼쳐지는 길. 3인이 달렸던 그 길은 이제 확장공사중이다.

"영화 '고래사냥' 이후 도시인들의 발길이 사철 끊기질 않아요. 89년엔 위판장이 좁아서 대대적으로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포구에 모텔도 들어섰습니다.

" 당시 촬영현장을 지켜봤던 주민 정성조 (56) 씨의 말이다.

방파제 끝에 춘자의 화신처럼 서있는 빨간색과 흰색의 등대, 깃발들을 나부끼며 떠있는 작은 어선들, 항구 곁으로 펼쳐진 눈부신 백사장, 출어준비에 바쁜 포구의 아낙네들…. 평범한 사람의 눈에도 남애항은 '영화속에 나올 만한 풍경' 이다.

포구 주차장엔 서울 번호판의 승용차들로 꽉 찼다.

서울탈출. 서울로 간 사람들은 다시 귀향을 꿈꾼다.

병태가 잡은 고래도 뜻밖에 '창녀의 귀향' 이었다.

"고래는 먼바다 속이 아니라 내 맘속에 있어요.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죠. " 라며 돌아서는 병태. 오전7시. 위판장은 발디딜 틈이 없다.

고래는 물론 없다.

고래 대신 살아있는 오징어.가재미.놀래미가 객들을 맞는다.

새벽 남애항엔 모든게 살아서 꿈틀거린다.

동해에 온 도시인들은 꿈틀거리는 생선을 보고 '고래사냥' 을 꿈꾸고 다시 도시로 간다.

남애 = 이순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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