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멕시코市 야당市長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13년 멕시코가 내전상태에 빠져들 때 18세 소년 라사로 카르데나스는 온건파 지도자 베누스치아노 카란사의 휘하부대에 자원입대했다.인디언 혈통으로 학교도 거의 다녀보지 못한 카르데나스 소년은 밑바닥에서 출발한 군생활에 눈부시게 적응,7년후 카란사의 승리로 내전이 종식될 때는 25세의 젊은 장군이 돼 있었다.

유능한 장군으로서의 평판을 발판으로 카르데나스는 정계에 진출했다.현 집권당인 제도혁명당(PRI)의 전신 민족혁명당(PNR) 결성(1929년)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그 후보로 1934년 대통령에 당선됐다.어차피 이기게 돼 있는 선거임에도 방방곡곡을 누비는 성실하고도 정력적인 유세활동을 통해 아직 정파(政派)연합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PNR을 국민정당의 틀로 키워내고 70년 연속집권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평가된다.

카르데나스는 재임중 농지개혁을 꾸준히 추진해 전 경작지의 절반을 무토지농민에게 나눠줬다.그리고 1937년에는 철도,이듬해에는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이 조치는 국내외 자본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지만,그의 지도아래 정치세력으로 조직된 농민층과 노동자층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구호로 끝날 뻔한 멕시코혁명을 실천에 옮긴'혁명의 집행인'이 그에 대한 평가다.

1940년 임기를 끝내며 45세의 나이로 정계를 은퇴한 카르데나스는 2차대전중 국방장관을 맡은 외에 다시 공직을 맡지 않았다.그러나 1970년 죽을 때까지도 집권당내 좌파의 대부(代父)로서 정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자신이 창당에 참여했던 집권당의 당적을 평생 지켰지만,1960년대에는 야당으로 출범한 좌익연합 민족해방운동을 공공연히 후원하기도 했다.

그 아들 콰우테목 카르데나스는 1987년 PRI를 떠나 두번 야당후보로 대통령선거에 도전한 뒤 이번에 멕시코市 초대 민선시장으로 당선됐다.PRI 일당독재체제가 무너지는 하나의 고비라고들 한다.그러나 세디요 대통령은 1994년 최악의 위기속에 취임하면서 야당지도자 안토니오 로사노를 검찰총장에 임명해 국민의 신뢰를 상당히 회복하고 일당체제 이후에도 대비해온 실적을 갖고 있다.야당출신 멕시코市 시장의 출현이 일당독재의 해소과정에 어떤 작용을 할지,새 시장의 집안이 집권당의 역사에 얽혀온 배경 때문에 더더욱 흥미롭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