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속스캔들’ 770만 명 돌파 … 역발상 투자로 흥행 ‘과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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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대박’이란 말이 딱 맞는다. 영화 ‘과속스캔들’(이하 ‘과속’)이 2일 관객 770만 명을 넘어섰다. 투자·배급사 롯데엔터테인먼트는 “이 추세라면 다음 주 초쯤 800만 명 돌파가 가능할 것”이라고 3일 밝혔다. 800만 명을 넘으면 ‘웰컴 투 동막골’(2005년, 800만 명)을 누르고 역대 한국영화 흥행 7위에 오르게 된다.

미혼모 딸 정남 역의 박보영(左)과 아들 기동 역의 왕석현(右). 두 신인배우의 과감한 캐스팅은 ‘과속스캔들’의 역발상이 빛나는 부분이다.


‘과속’이 이렇게 과속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톱스타나 내로라하는 감독도 없었다. 대작도 아니었다. 코미디 영화의 익숙한 공식대로 만든 소위 ‘안전빵’ 기획도 아니었다. 그런데 바로 그 틈새에 성공 요인이 있었다. 발상의 전환으로 ‘엎어질 영화 1순위’에서 ‘2008년 흥행 1위’가 된 ‘과속’의 성공을 투자와 경영의 관점에서 다시 봤다.

◆저평가·중소형주 밀어붙인 뚝심=저평가주는 이익이나 자산가치에 비해 주가가 낮은 주식. 그만큼 주가가 오를 잠재력이 크다는 뜻도 된다. 한국투자증권 김학균 수석연구원은 주식이 저평가되는 이유 중 하나로 “투자자들이 성장 가능성보다 외형, 즉 미래보다는 과거에 주목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꼽았다. CJ엔터테인먼트·쇼박스 등 메이저 투자사로부터 줄줄이 퇴짜 맞았던 ‘과속’은 전형적인 저평가주였다. 다수의 투자사가 강형철 감독이 무명의 신인이라는 점 때문에 시나리오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채 거절했다.

시나리오 초고는 3년째 빛을 보지 못하던 ‘묵은’ 것이었다. 미혼모 딸 정남 역의 박보영과 아들 기동 역의 왕석현 등 배우가 미덥지 못했던 건 말할 나위도 없었다. ‘36세 할아버지, 22세 딸, 6세 손자’라는 설정에 ‘이게 뭐냐?’며 황당해하는 반응도 수차례 겪었다. 하도 찬밥 취급을 당하자 제작진(토일렛 픽쳐스)은 ‘대본 표지 색깔과 글씨체가 안 좋아서 그런가’ 싶은 생각까지 들어 바꿔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의 ‘이 작품 된다’는 확신은 변함 없었다. 불황이 흥행을 간접적으로 도왔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김 수석연구원은 “저평가주라 하더라도 경제 환경의 변화(불황)로 소비자 심리가 바뀌면(여유가 없어져 훈훈한 웃음이 담긴 웰메이드 코미디를 원함) 재평가(의외의 흥행)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과속’은 비교적 저렴한 제작비(순제작비 23억원 포함 47억원)를 들인 ‘중소형주’라 수익률도 좋다. 이미 개봉 11일 만에 손익분기점(약 140만 명)을 넘었다. 제작사와 투자사에 돌아오는 입장료 수입만 얼추 계산해도 총제작비의 다섯 배에 가까운 230억원이다.

◆철저한 체질 개선과 준비=‘과속’의 1년여에 걸친 프리프로덕션 과정은 마치 기업의 군살빼기를 연상시킬 정도로 철저했다. 이안나 프로듀서는 “‘추격자’가 대본을 38회 고쳤다던데, 이 영화는 100회 이상 도저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고쳤다”고 말했다. 원래는 남자 3대의 설정이었지만 좀 더 밝은 분위기를 위해 ‘남-여-남’으로 바꿨다. 정남은 중학생 때 아이를 낳는 설정이었다가 “사회 통념상 물의를 빚을 수 있을 것 같아” 고1 임신으로 바뀌었다.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를 발굴, 팀 작업을 거쳐 ‘물건’을 만든 ‘과속’의 사례는 기업 인수합병(M&A) 후 가치를 높여 비싸게 되파는 전략과도 닮은 데가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진 직후인 2001년 애플은 MP3 플레이어 ‘아이팟’을 내놔 현재까지 누적 판매대수 2억 대라는 대박을 기록했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역발상 투자였다. ‘과속’의 역발상이 빛난 대목은 박보영과 왕석현이라는 ‘차세대 성장동력’에 과감히 승부를 걸었다는 점이다. 노래 부르는 설정 때문에 처음에는 “웬만한 소녀그룹 멤버 이름은 다 외울 정도”로 아이돌 가수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결국 오디션에서 뛰어난 노래 실력을 보였던 박보영을 택해 두 달간 보컬 트레이닝과 기타 연습을 받게 했다. 제작진은 또 1000명 가까운 후보 중 연기 경험은 전무하지만 자연스러운 무공해 이미지가 살아 있는 왕석현을 가려뽑았다.

지난해 개봉한 한국 영화는 108편. 이 중 손익분기점을 넘긴 건 15편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과속’의 성공은 극도로 위축된 올해 충무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성경제연구소 고정민 수석연구원은 “작품의 질만 뒷받침된다면 제작 편수가 줄어들고 제작비를 아껴 써야 하는 지금의 긴축 상황이 오히려 한국 영화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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