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외교안보엔 국익만 존재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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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주한미군 관련 심야 대담프로를 보다 그만 TV를 꺼버렸다. 사활이 걸린 안보문제를 놓고 극도의 분열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시청률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국민에게는 불안감을 줄 뿐이다. 사활이 걸린 외교안보 문제가 시청률과 보혁 대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유감이다. 지금은 국론을 모으고 초당적으로 대처해야 할 중대한 시기다.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의 가장 우익적 지도자로 정평이 나 있지만 이라크전을 반대했다. 반면 유럽의 가장 진보적 지도자인 블레어 영국 총리는 이라크전 참전을 결정했다. 외교안보 문제는 보혁이 있을 수 없으며 국익만 존재한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한다.

주한미군 감축.재편으로 반세기간 유지돼 온 우리의 안보 시스템은 혁명적 전환의 기로에 서게 됐다. 현재의 한.미동맹 체제는 한국전쟁 직후에 형성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냉전형 체제로 지난 반세기간 전략환경의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미국의 주한미군 재편에서 촉발됐지만 한.미협상은 우리의 안보.동맹 시스템을 시대에 맞게끔 재정립하는 중대한 도전이자 기회다. 이 작업은 50년 묵은 판도라상자를 여는 게 될 것이다. 1만2000여명의 주한미군 병력 감축도 중요한 과제지만 이것이 가져올 시스템의 파장이 더욱 중요하다. 지상병력이 대폭 감축된다면 사령부 기능의 슬림화가 불가피하며 미8군사령부.유엔사 등의 해체가 점쳐진다. 한반도 정전체제를 관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유엔사의 해체는 당장 휴전체제의 관리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결국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까지도 시야에 둔 논의가 필요하다. 또 미국 지상군이 대폭 감축한 상황에서 한.미연합 지위체계의 변화는 불가피할 것이다. 전시 작전지휘권 문제에 대한 심각한 논의가 필요하다. 주한미군 감축.재편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협상에서 한.미연합 전력의 억제력은 공고히 유지되는 방향에서 차질없이 이 과정들이 수행돼야 할 것이다.

주한미군 재편 문제를 보는 우리의 시각은 너무 '자주국방'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시야를 넓히자. 주한미군 전투병력의 후방 배치와 대폭적 감축은 북한이 그토록 주장하던 미 군사 위협에 있어 매우 긍정적 변화다. 북한은 우리가 군비 통제를 제기할 때마다 주한미군이 포함돼야 한다는 논리로 대응해 왔다. 미군의 감축.재편은 남북한과 주한미군을 포함하는 한반도의 포괄적 군비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전기임에 틀림없으며 적극적 군비통제 이니셔티브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편 주한미군은 중국의 코앞인 대륙에 주둔한 유일한 미 지상군이다. 이 부대의 감축.재편은 냉전시의 과도한 대중(對中) 봉쇄망을 풀고 테러, 대량파괴무기 확산 등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한미군 재편이 마치 중국을 겨냥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초당적 지혜와 창의적 발상을 통해 새로운 한.미동맹의 비전을 만드는 일이다. 주한미군 관련 워싱턴발 보도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할 게 아니라 우리의 국익을 가장 잘 보장해줄 수 있는 동맹의 비전을 만들고 이에 입각해 능동적으로 대미 협상에 임해야 한다. 새로운 동맹의 확실한 비전을 정부가 제시할 수 있을 때, 주한미군 재배치나 새로운 동맹에 대해 주변국은 물론 국민적 이해를 구할 수 있다. 이는 평택에서 제2의 부안사태를 막는 첩경이 된다. 2007년께 주한미군의 평택 배치가 추진되는 만큼 1~2년 내 국민을 납득시킬 수 있는 동맹에 대한 장기적 비전이 제시되지 못한다면 한.미동맹은 표류할지도 모른다. 냉전 붕괴 직후 표류하던 미.일동맹도 1996년 클린턴.하시모토 간의 '미.일 신안보선언'을 통해 수습된 바 있다. 2003년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포괄 동맹으로의 전환을 위한 비전이 이른 시일 내에 제시되기를 기대한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