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 입이 거칠다 - 말끝마다 욕설 생활용어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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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말 한마디에 2~3개의 욕을 섞어 쓰는 게 보통인 요즘 아이들의 말버릇.화가 나 상대방 기분을 상하게 할 목적이 아니다.불량스러운 몇몇 소수 아이들만의 특별한 말투도 아니다.씨발.놈.년등의 욕이 아이들의 생활용어가 돼 버렸다.

“개×놈아,빨랑 내놔 씨발.” 초등학교 4학년 P군이 옆자리의 짝에게 빌려간 지우개를 돌려받기 위해 하는 말이다.지우개를 돌려주는 짝도 이에 지지 않는다.“×새끼 존나 싫어.” 뭔가를 강조하고 싶을 때는 열라.졸라.대땅.짱.캡등 어른들은 모르는 희한한 부사를 붙이기도 한다.재미있고 멋있고 맛있는등 긍정적 표현이라고 해서 이런 거친 단어가 빠지라는 법은 없다.서울 S여고 1학년 교실.쉬는 시간 끼리끼리 모여 휴대용 오락을 즐기다 한 학생이 환호를 지르며 말한다.“씨발 이거 열라 재밌다!” 순간 몰려들었던 아이들중 하나가 대단한게 아니라는듯 코웃음치며 말한다.“기지배 짱 웃기고 있네.” 남자 성기를 지칭하는 ×에'나오다'는 말을 붙여 사용돼오던 비속어들이 이제는 욜라.욘나.욘니.존니.존나등 아류어까지 만들내면서 아이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관계기사 30면〉 서울 U초등학교 5학년 홍경아양은“50명 가까이 되는 우리반 아이들 가운데 욕을 하지 않는 아이들은 한두명 정도”라고 말한다.

거칠고 상스러운 말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한 아이들의 설명은 간단하다.남들이 다 쓰니까 쓴다는 것.심지어“어른들도 우리를 혼낼때 새끼.지랄.죽어라등의 욕을 쓰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학생들까지 있다.

경희대 서정범(徐廷範)교수는 “우리나라 욕에는'주리를 틀 놈''염병할 놈''조상을 팔아먹을 놈'같은 형벌.병.조상숭배와 관련된 여러가지 유형의 욕이 있을 정도로 욕이 발달한 나라”라고 설명한다.하지만 이런 전통적인 육담과 요즘 아이들이 쓰는 욕은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 徐교수의 분석.해학적이고 교훈을 담았던 과거의 육담과 달리 요즘 욕은 욕구불만을 표현하는 자극적인 단어일 뿐이라는 것이다.

말을 겨우 배우기 시작하는 유아들도 욕의 무풍지대에 살고 있지는 않다.유치원 교사경력 6년째인 김수연(金秀姸.28)씨는“형이 있거나 여러군데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일수록 이상한 욕을 많이 사용한다”며“뜻도 모르고 단순히 흉내내는 수준이지만 다른 아이들까지 쉽게 따라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털어놓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유아들의 욕 사용은 언어발달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종의'말유희'로 뜻없는 음절을 반복하면서 언어 발음법을 숙달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이화여대 유아교육과 이기숙(李基淑)교수는“아이들이 만 3~5세가 되면 문장 구성력과 어휘력이 갑자기 늘면서 새로운 용어에 대한 관심이 커져 어른이나 또래들이 사용하는 욕을 모방하기 시작한다”고 말했다.따라서 성인이 사용하는 욕처럼 상처를 주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습관이 될 경우 거칠고 무례한 문화에 익숙해질 우려가 크다.李교수는“욕 사용이 습관화하지 않도록 아이가 처음 욕을 사용할 때부터 욕은 나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켜주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통적으로 욕이 발달한 문화 때문인지 자녀들의 욕습관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부모는 많지 않다.특히 남자아이들이 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선 더욱 너그럽다.초.중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상담하고 있는'신나는 전화'김순주(金順珠)상담과장은“상담하는 과정에서 중학생들이 성과 관련된 은어를 사용하는등 거친 말을 쓰는 경우를 발견하곤 하지만 그 문제로 상담하는 부모나 학생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십대들의 쪽지'발행인 김형모(金螢模)씨도“어린 아이가 욕하는 행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부모에게까지 욕을 쓰는 단계에 이르러 허겁지겁 상담편지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상담한 한 40대주부도 고등학생인 아들에게 평소처럼 공부하라고 다그치다 아들이“내버려둬,씨발”이라며 욕을 사용하자 놀라 상담을 의뢰했다는 것. 金씨는“아이가 부모에게 욕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공부에 대한 과도한 압박감에 시달린데다 부모로부터 무시당해왔다고 여긴 탓으로 증오심과 복수심이 쌓여있던 것이 사춘기때 폭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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