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교과부가 교과서 저작권 보호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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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해 하반기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은, 출판사가 저자의 동의 없이 교과서 내용을 수정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런데 법원은 얼마 전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 저자들이 낸 ‘저작권 침해금지 가처분신청’을 기각했다. 저자들의 저작권을 인정하면서도 수정·개편과 관련된 계약서상의 조항과, 저자와 출판사가 교과서 검정업무를 담당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제출한 동의서를 근거로, 저자의 동의 없는 교과서 수정을 인정한 것이다.

계약서와 동의서의 법적 해석은 법원의 몫이겠지만, 교과부와 출판사의 일방적인 교과서 수정을 법원이 막아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저자의 한 사람으로 사뭇 유감스러운 판결이었다. 이 판결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문제의 계약서 조항은 금성출판사 교과서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검정교과서 계약에는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내용이다. 또한 동의서는 저자와 출판사 사이에 맺은 약정이 아니라, 검정교과서 심사 신청을 하려면 저자와 출판사가 공동으로 제출해야 하는 첨부 서류 중 하나이다. 이 동의서를 제출하지 않고는 검정 신청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서류들을 근거로 저자의 동의 없이 교과서 내용을 수정할 수 있다면, 이 문제는 단지 근현대사 교과서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조항이 담긴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동의서를 제출하였을 대부분의 검정교과서 내용을 저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교과부의 지시에 따라 출판사가 수정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저자의 저작권을 근본적으로 침해하는 것은 물론, 교과서 검정제도의 근본정신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 조항들을 근거로 교과부가 교과서 내용을 통제한다면, 교과서 검정제도가 여러 종의 국정교과서를 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만약 계약서와 동의서가 이런 목적에 이용될 것이라면, 모든 출판사는 교과서 저자들과 맺은 계약서 내용에서 이 조항을 당장 삭제해야 한다. 그리고 교과부는 교과서 검정 신청 서류에서 동의서를 제외해야 한다. 그러지 않은 채 저자들에게 “너희들이 동의 해놓고 왜 말이 많으냐”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한국 교육을 책임지는 교과부가 할 일이 아니다.

교과부는 교육과정과 교과서 검정의 주체이다. 교육과정을 만든 것도 교과부이고, 검정심사를 거쳐 근·현대사 교과서를 승인한 것도 교과부다. 교과부는 당연히 정해진 교육과정에 따라 집필되고, 검정절차를 통과하여 사용되는 교과서의 저작권을 보호해야 한다. 그런 교과부가 오히려 검정에 통과된 교과서의 저작권을 부인하는 일에 앞장서는 것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국내 최대 교원조직을 자부하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에서는 법원의 판결에 성명을 내고 이제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논쟁을 중지하자고 했다. 초정권적이고 초이념적인 관점에서 교과서 검정을 하고, 학교 현장의 자율적인 교과서 채택권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옳은 말이다. 이 성명의 내용처럼 정말로 교과서가 이념과 정치권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왜 더 일찍 이런 주장을 하지 않았을까. 왜 근현대사 교과서를 이념의 논쟁으로 끌어들인 사람들의 주장에 동조하였을까.

정말로 이를 계기로 앞으로 교과서가 더 이상 이념과 정치적 공세의 수단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들의 관점이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좌편향’이니 ‘친북’이니 하는 말로 상대를 공격하면 무조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교과서까지 그런 이념공세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을 때, 정말로 교육이 정치권력이나 이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교과서를 교육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김한종 한국교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