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살배기 손자 보챌까 수면제 준비 - 안기부가 밝힌 脫北가족 뒷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金원형.安선국씨 가족 14명의 귀순은 국경을 넘은 가족애와 치밀한 준비가 일궈낸 한편의 드라마였다.5,6년간에 걸친 치밀한 계획과 각고의 노력끝에 13일 인천항에 도착한 이들은 드디어 자유를 찾았다는 안도감에 피곤함도 잊은 모습이었다.기자회견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24인승 버스에 오른 후 金씨는 처음으로“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정말 이곳이 남한이 맞느냐”고 되묻는등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귀순한 김경호씨 일가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사는 친척들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탈북에 성공한 것이 밝혀져 재미(在美)교포사회가'탈북의 지원지'로 각광받고 있다.

안기부가 발표한 이들 가족에 대한 1차 합동신문 결과를 토대로 탈출에 얽힌 뒷얘기를 정리한다.

◇인적사항=安씨는 북한군 상위계급 출신으로 수산부업기지 외화벌이 요원을 거쳐 국가과학원 평북 자개공급소 외화벌이 담당으로 신의주시의 같은 마을에서 10여년간 살면서 金씨와 친분관계를 맺었다.

탈북을 사실상 주도한 金씨는 러시아벌목공 출신으로 577부대 외화벌이 지도원으로 근무했다.그는 선박관련 경험이 전혀 없으나 이번 탈북에 사용한 배를 중국에서 사와 당국에 헌납한 공로로 북한 해군당국에서 기관장 직책을 부여받았다.물론 헌납은 탈출을 위한 위장계책이었다.金씨의 부친은 6.25당시 주일(駐日)한국대표부에 근무했으며 일본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 ◇金씨의 재미 가족및 상봉경위=6.25당시 헤어진 어머니 車순덕(82)씨와 이모 순기(75)씨,쌍둥이 동생 인형(57)씨는 76년까지 남한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주했다.

90년께 이모 순기씨가 남편과 함께 시집인 평북 피현군을 방문,조카의 안부를 확인한 것이 계기가 돼 서로 연락이 됐다.

金씨는 함께 귀순한 선장 安씨가“돈을 벌려면 배가 필요하다.중국에 나가 연락하면 미국의 동생으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권유를 받았다.이에 두사람은 지난 3월초 단둥(丹東)에 나와 동생 인형씨에게 전화,같은달말 베이징(北京)에서 만나“남한으로 가고싶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金씨는 4월10일 아들 2명을 데리고 다시 중국으로 나가 4월말 베이징에서 인형씨와 재접촉,탈출선박 자금으로 2만달러를 받았다.

◇물품구입등 탈북준비=金씨는 선장 安씨와 친분이 있는 중국 조선족의 주선으로 5월3일 단둥에서 32급 목선인'요동어 3043호'를 5천5백달러에 구입했다.또 신의주 장마당에서 쌀 2백㎏,옥수수 5백10㎏을 사 선적했다.이는 식량목적 외에 해안경비대에 걸릴 경우“외화벌이를 위해 수산물과 교환하려는 것”이라고 둘러대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또 중국산 가스레인지는 항해중 취사를 위해 마련했고 라면.국수등은 단둥거주 조선족으로부터 받은 것이다.한국산 디스담배는 구조당시 한국해군이 배안으로 던져준 것이며 이외에도 항생제.아스피린등 미국 동생이 제공한 약품 1가방 분량도 가지고 있었다.

가족들이 입고 있는 의류는 91년 방북한 동생이 준 것과 북한 장마당에서 구입한 중국제 의류며 소형카세트도 동생이 사준 것이다.

이들은 특히 金씨의 손자 남수(2)군이 급박한 상황에서 보챌 경우를 대비,수면제를 주사하기 위한 1회용 주사기를 준비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탈출과정=단둥에서 구입한 선박으로 3일 신의주로 귀환한 金씨는 4일 북한 해군부대에 자신을 비롯한 4명의 이름으로 선박등록을 했다.그러면서 운항증명서.출항증명서등 항해에 필요한 서류도 확보했다.

결행일인 9일 安씨및 金씨의 아들 2명은 선박을 타고 신의주를 떠나 철산으로 향했고,金씨는 평북도 안전국 소속 트럭운전사에게 북한돈 3천원의 뇌물을 주어 두가족 모두를 트럭에 태워 역시 철산으로 달렸다.여기서 재회한 두가족 일행은 11일 오전11시 산둥(山東)반도 공해상으로 빠져나갔다.

12일 오전 남쪽으로 방향을 튼 이들은 11시간여만인 이날 오후4시쯤 백령도 근해에서 우리 해군함정과 조우하게 돼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다.

한편 金씨 사촌형으로 서울에 살고 있는 일형(60)씨는 지난 3월 베이징에서 조카 희근.희영씨를 만났을 때“배를 사서 남하할 때 큰 배를 만나면 살고 작은 배를 만나면 죽는다”고 말했다고 당국은 설명.당국은“큰 배는 한국 함정,작은 배는 북한 함정이라는 뜻으로 일형씨가 조카들에게 당부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일형씨는 또“남하할 때는 반드시 중국 어선으로 위장하고 북한 경비정에 발각됐을 때는 항해착오라고 변명하라”고 말했다는 것. 오영환.이영종 기자

<사진설명>

목선을 타고 북한을 탈출,13일 새벽 인천 해경부두에 도착한 안선국씨가 노모 김봉선씨를 업은채 우산을 받쳐들고 나오고 있다. 인천=변선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