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전 '홍길동' 영어대본 찾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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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934년 어느 날, 미국 하와이 대학교의 패링턴 극장(Farrington Theatre). 막이 오르자 한복.상투 차림의 남녀 배우들이 유창한 영어로 대사를 쏟아낸다. 연극의 남자 주인공 이름은 길동. 자세히 살펴보니 무대의 배우들은 물론 객석의 관객들도 대부분 한국인이다. 뙤약볕을 견디며 사탕수수 농장에서 하루 종일 비지땀을 흘렸을 이민 1세대 동포들은 낯익은 내용의 공연을 즐기며 노동의 시름을 잊는다.

30년대 하와이 한국 이민사회의 풍속도를 보여주는 영문 연극대본이 발견됐다.

숭실대 국문과 조규익 교수는 허균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바탕으로 한 영어 연극 '로터스 버드(Lotus Bud)'의 대본 사본을 1일 공개했다. A4 용지 크기에 영문 타자기로 친 '로터스 버드'의 대본은 모두 62쪽. 겉장과 3막 뒷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1, 2막은 온전한 상태다.

조 교수는 "2년 전 미국 LA에서 만난 이민 3세 여류 시인 스테파니 한이 자기 외할머니의 유품이라며 보여준 대본을 복사해 두었다"고 밝혔다.

스테파니 한의 외할머니는 70년 전 공연에 스태프로 참여했다고 한다. 조 교수는 "조선대 오인철 교수가 99년 펴낸 '하와이 한인 이민과 독립운동'에도 관련 기록이 나온다"고 소개했다. 34년 하와이에서 보성회가 한국 문화를 소개할 때 '로터스 버드'를 공연했다는 것이다. 보성회는 당시 하와이 대학의 한인 학생 조직이다. 기록으로만 알려졌던 연극 대본의 실물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홍길동전'과 '심청전'을 뒤섞어 놓은 듯한 '로터스 버드'의 내용도 흥미롭다. 우선 '연꽃의 싹(로터스 버드)'을 뜻하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심청전'에서 심청은 연꽃을 타고 용궁에서 인간 세상으로 돌아왔다. 물론 '로터스 버드'는 '홍길동전'에 더 가깝다. 길동과 길동의 아버지 홍판서 등 등장인물이 겹친다. 홍판서가 용꿈을 꾸고 난 후 태어난 길동이 결국 아버지의 집을 등지고 도적굴을 찾아간다는 이야기의 큰 줄거리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의 초점은 길동을 통한 적서 차별 철폐, 탐관오리 처벌이 아니라 길동과 도적의 딸 '연화' 사이의 사랑에 맞춰져 있다.

조 교수는 "연극을 무대에 올린 주인공들은 이민 한인들의 후견인이었던 미국인들, 정서적으로 이민 1세대와는 차이 나는 '미국화된' 이민 2세대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바탕은 '홍길동전'에 두었지만 '로빈 훗'과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티프가 '로터스 버드'에 깔렸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외국 문학을 수입하기 바빴던 20세기 초반 하와이에서 번안된 형태로나마 한국 문학이 소개된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국문과 서연호 교수도 "30년대 하와이 한인 이민사회에서 연극이 공연된 사실은 알려졌지만 당시 대본이 국내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5.6일 이틀간 이화여대에서 열리는 전국국어국문학 학술대회에서 관련 내용을 '홍길동 서사의 서구적 변용-새 자료 '로터스 버드'의 가치와 의미'라는 제목으로 발표한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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