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곁의문화유산>수원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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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 신도시는 어디일까.서울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수원이다.본래 경기도 화성 화산(현재의 안녕리 일대) 아래에 있었던 수원은 1789년 정조의 명에 따라 지금의 수원 팔달산 아래로 옮겨졌다.뒤

주속에 갇힌 채 참혹한 죽음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 아래로 이장한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으나 정작 정조는 자신이 이상으로 꿈꾸고 있던 왕권 사회를 실현할 초석으로 신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오랫동안 정치 권력을 장악한 노론 벽파의 정치 판도에서 정조가 당면한 큰 과제는 왕권 강화였다.마침 18세기 사회는 활발한 상업 활동으로 경제의 힘이 커지고 있었다.수원의 입지는 서울과 3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 활동을

위한 도시로 적합했고,정조는 여기에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위를 두고 각종 경제적 특혜를 주었다.수원을 기존 세력이 진을 치고 있는 서울에 대항할 막강한 군사력과 튼튼한 경제력을 갖춘 신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비록 수원이 건설 11년만인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더불어 한낱 지방 도시의 하나로 주저앉게 됐지만 1784년부터 2년6개월 동안 건축된 수원성은'조선 성곽의 꽃'이랄 만큼 당시 최고 지식인과 장인들의 역량이 총동원된 역작이었다.

조선의 성곽이 보통 읍성 아니면 산성인 반면 수원성은 팔달산을 끼고 낮은 구릉의 평지를 따라 축성된 평지성이다.또한 다른 성곽에서는 보기 힘든 많은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다.특히 망루의 역할도 하고 총안(銃眼)으로 적의 침입도 막게끔 한 공심돈이 눈에 띈다.전시에는 적군 감시와 지휘소 기능을 하면서도 평시에는 휴식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게 설계된 방화수류정도 독특하다.조선의 석성 전통에 실용성을 갖춘 벽돌을 섞어 성을 쌓고 기중기등 과학 기기를 적극 활용한

점도 돋보인다.정약용(丁若鏞)등의 앞선 실학 정신이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수원성 축성에 관한 모든 상황은 '화성성역의궤'라는 기록으로 꼼꼼히 남겨져 1975년 대대적인 수원성 복원때 교과서로 이용되었다.따라서 수원성은 변형된 채 복원되는 비운을 피할 수 있었다.

성곽을 따라 산책길이 잘 닦여 있어 따뜻한 봄날 아이들을 데리고 나서면 좋은 곳이다.

▶가는길=수원 시내 한복판에 있다.시내로 들어서기만 하면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팔달문과 장안문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다.성곽을 돌아보는데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글=김효형〈한국문화유산답사회〉 사진=김성철〈사진작가〉

<사진설명>

팔달산을 낀 수원성은 조선 정조때의 건축역량이 총동원된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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