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열며>새봄에 거는기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사제관 앞에 있는 목련 나무가 꽃망울을 만들고 있다.목련은 언제나 봄 소식을 내게 제일 먼저 알려준다.가만히 어루만져보니 몽우리마다 터질듯한 물기가 담겨있고 더러는 기쁨을 참지 못해 살며시 미소짓는 산골처녀의 입처럼 방긋방긋 웃는

모습으로 벌어져 있다.

손님이 오셨길래 어디까지 봄이 왔는가도 궁금해 이쪽저쪽 계곡을 다녀보니 겨울 내내 얼어있던 계곡 얼음이 녹아 흘러 내리는 물소리가 여간 흥겹지 않고 찔레나무.싸리나무.개두릅나무 등의 햇순이 좁쌀만하게 나오며 성큼 다가온 봄 내음을

코끝이 시리도록 채워주고 있다.

희망과 새출발의 상징인 새봄에 총리와 여당의 대표도 새로 나오고 했기에'새술은 새부대에 담으라'는 마태오 9장 17절의 성서 말씀을 충심으로 드리고 싶다.탐욕과 교만으로 그 맛이 변해버린 술과 산(巨山,小山)들이 지은 누더기 포대

는'돌아와요 부산항'노래를 부르며 갈매기 슬피우는 꽃피는 동백섬으로 보내드려야 할 것이다.

얼굴마담 노릇이나 하고 누더기 포대나 꿰매고 있게 되면 모처럼 희망과 새출발의 상징인 새봄과 함께 시작한 새총리나 대표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는커녕 씻을 수 없는 슬픔과 좌절을 안겨줄 것이다.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릴줄 알

때 새출발,새희망이 가능하다.그러나 어쩌면 불가능하게 보일지도 모른다.그동안 쌓여온 누더기가 너무 많고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위에서 아래까지 반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지도자가 희망을 가져야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고,용

기를 가져야 국민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

구조악으로 일그러진 국가기능,찢겨진 마음,절름발이 경제,희망없는 정치,이 모든 것이 오늘날의 시국이 돼버렸는데 이러한 상황 아래서 무슨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하고 회의에 젖은 말을 하는 이도 있겠지만,인간이란 절망속에서

오히려 희망을 보고 고통 속에서 양심을 칼처럼 세울 때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세계적인 명화 중에'소망'이라는 제목의 화가 로지 프레데릭와츠의 그림이 있다.이 그림은 줄이 다 끊어져 한 줄만 남아 있는 허름한 하프에 헝클어진 머리를 박은채 음악을 연주하려고 애쓰는 한 여인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그려놓은 것이다

.한 줄만 남은 하프로 무슨 연주를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지 말자.여기에 온 정성과 진실과 피땀어린 노력을 인내있게 쏟을 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듯 신의 손끝이 닿아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인 단테는 지옥의 입구에 이런 말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일체의희망을 버려라.”사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이며,희망을 만들지 않는 사람들이 가야 할 곳 또한 지옥이다.

중국 우화집에 보면 독수리 한 마리가 얼음 위에 죽은 고기를 정신없이 배부르게 먹고 나니 날개가 얼음에 얼어붙어 날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눈에 보이는 죽은 먹이를 실컷 먹고 보니 날아야 할 날개가 얼음에 붙어버린 것이다.

오늘날의 독수리는 얼음에 날개가 얼어붙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과 믿어 왔던 가신(家臣) 때문에,그리고 그 특유의 교만과 독선,그리고 허세 때문에 날개가 얼어붙었다.

독수리보다는 못하지만 보잘 것 없는 날개짓이라도 해 날 수 있는 새,국민에게 희망과 용기의 씨앗을 물어다 주는 새가 되어달라.그리고'그 물에 그 밥'이라는 소리를 듣지 말고 새봄에 뿌려지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달라.또한 무엇

이 되겠다는 욕심에 상대방 꼬리나 물고 늘어지는 졸장부가 되지 말고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희망을 주는 횃불이 되어달라.봄이 오는 계곡 바위 위에 걸터앉아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 남은 하프 줄로 값진 연주를 만들어 내는 여인처럼,

한알의 밀씨를 심고 새술을 새부대에 담아 가는 새총리와 새대표가 되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김영진 강원정선성당 주임신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