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의시대>10. 끝. 質로 먹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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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보리밥.주먹밥.수제비.찐감자.죽….50,60년대만 해도'한끼를 때우기 위해'억지로 먹어야 했던 음식들이'일부러 찾아먹는 별미'가 돼버린지 오래다.아직도 결식아동들의 얘기가 신문지상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식생활

수준은 이제 선진국형으로 변하고 있다.먹는다는 것이'배를 채우기 위한 것'의 개념에서'맛을 즐기는 문화생활'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한국음식업중앙회가 지난해 7월 전국의 성인남녀 1천4백4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가격에 상관없이 맛있는 집을 찾는다'는 응답자가 41.9%에 이르렀다.'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점을 일부러 찾아 다닌다'는 사람도 45.1%.

PC통신의 맛있는 집 소개방에 많은 조회자들이 몰리고 잡지나 일간지에 음식점 소개가 빠짐없는 것도 이같은 추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외식을 할 때'맛'이 얼마나 중요한 선택기준이 되었는가는'양'을 위주로 했던'가격파괴형'음식점들의 부침에서도 알 수 있다.한국음식업중앙회의 김태곤(金太坤)부장은“4천원~5천원대 가격에 고기를 맘껏 먹을 수 있었던 고기뷔페의 경우

93년,94년에만 해도 한 구(區)에 40~50개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한 구에 고작 1~2개가 남아 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95년부터 한 동(洞)에 10개까지도 생겨났던 수산물직판장들도 질(質)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의 기호에 따라

2~3개로 줄었다.이런 현상에 대해 金부장은“가격경쟁을 위해 질이 떨어지는 고기를 사용하거나 표준 ㎏수에 모자라는 아직 성숙되지 않은 수산물을 판 결과”라고 분석한다.

요즘 손님들은 맛에 대해 민감하기 때문에 금방 그 차이를 알고 외면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 전문식당들.또 같은 고기집이라도 자갈돌 구이니 무쇠판 구이니 하는 특징이 있어야 손님을 끌 수 있게 됐다.여기에 분위기나 서비스 또한 외식을 할 때 중요한 식당선택의 기준이 되고 있다.'먹는다'는 사실

보다는'무엇을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음식에서'맛'을 중시하게 된 것은 요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으로도 알 수 있다.문화센터의 경우 요리강습은 가장 인기있는 과목 중의 하나.최근 한 주방기구업체가 마련한 요리교실에선 남성반을 신설할 만큼 남성들의 요리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TV의 토크쇼나 오락물에도 요리코너는 약방의 감초 역할을 한다.

일반 가정의 식탁에 변화를 가져온 또다른 요인은 건강에 대한 관심의 증가.이왕이면 적은 돈으로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는 것만이 알뜰주부의 덕목이던 시절은 옛이야기.유해식품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조금 더 비용이 들더라도 무공해식품,건

강식품 정보를 빨리 습득해 구입하는 것이 주부들에게 요청되는 새로운 덕목이 되고 있다.요즘 재래시장에서도 유기 농산물이라고 해서 벌레먹은 배추,흙묻은 감자가 더 비싸게 팔리는 것 역시 그런 이유다.

현재 유기 농산물은 일반 농산물에 비해 평균 20%정도 비싼편.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협동조합 형태로 등장한 유기농산물 전문판매장은 소비자들의 좋은 반응에 힘입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최근엔 농협까지 가세,지난해 5월말 서울양

천구신정동에 첫 전문매장 개설 이후 강남구와 은평구,관악구 매장을 잇따라 개설했다.

한편으로 질을 따지는 것은 식생활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현상이 됐다.성균관대학교의 이창우(李昌雨.산업심리학)교수는 이를“기존의 단순한 생리적 욕구의 해결이라는 차원에서 벗어나 그만큼 여유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비쌀수록 좋은 것'이라는 믿음으로 질에 대한 충분한 보상도 감수하겠다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악용하는 비뚤어진 상혼(商魂)이 빗나간 사치풍조를 조장하기도 한다.그렇기 때문에 李교수는“비싼 것을 선호하는 소비형태 또한 소비자의

잘못으로 매도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상품을 공급하는 사람들 사고의 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질이 절대적 가치가 되고 있는 세상.이제 개인적인 소비생활 뿐만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생활속의 인간관계에서도 보다 질적인 그 무엇을 추구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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