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그래도 못메운 불신의 늪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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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25일 담화를 접한 국민들은 착잡한 표정이다.

아들의'허물'을 이유로 현직 대통령이 사과담화를 발표하기는 건국 이래 처음이다.

金대통령은 담화에서“진위 여부를 떠나 한보사건에 제 자식이 거명되고 있다는 사실이 제게는 크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진솔한 성격을 좋아하는 적잖은 시민들은 동정적인 반응을 보였다.지난 대선때 金대통령을 지지했다는 30대 은행원은“대통령이 참 자존심이 센 사람인데…”라고 말을 흐리면서“참 안됐더라”고 했다.“다 내 뜻대로 해도 자식만큼은

맘대로 안되는 법”이라며 공감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그러나“잘못했다는 뜻은 분명한데 왠지 미진하다”는 반응도 상당했다.한 야당의원은“사과만 있고 회개는 없다”고 촌평했다.

대통령의 상황인식과 대책이 너무'순진'하다는 지적이 많았다.金대통령은 한보게이트의 원인은 부정부패에 있고,그래서 부정부패 척결과 금융개혁.인사개혁에 주력하겠다고 했다.이에 대해 시민들은“지난 4년간의 개혁으로도 해결 못한 것을 임

기말 1년의 개혁으로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金대통령이 담화의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많았다.金대통령은 담화 말미에“아픔과 분노,허탈과 좌절을 딛고 새롭게 출발하자”고 강조했다.

남은 1년동안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가기 위해 정부와 대통령 자신에 대한 신뢰회복을 시도한 것이다.그러나 대통령의 사과담화에 동정적인 반응은 상당해도 金대통령정부에 대한 신뢰가 되살아났다는 사람은 보기 어렵다.

이는 金대통령 앞에 놓인 1년간의 숙제다.가신(家臣) 대신 전문가,비선(비線)조직 대신 공조직,전격조치 대신 예측 가능한 국정운용이 자리잡아야만 신뢰가 그나마 회복될 것이다.

金대통령의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은 전례(前例)때문이다.비관적인 사람들은 25일 담화를 92년 1월10일 있은 노태우(盧泰愚)당시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과 비교한다.盧씨도“남은 1년 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이겠다”“차기

대통령후보는 당헌대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될 것”이라는등의 방침을 밝혔다.그러나 경제는 좋아지지 않았고,여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은 분란으로 일관했다.

이 불신의 늪을 딛고 실패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金대통령은 뼈를 깎는 자기쇄신이 필요한 것 같다.대통령이 최초의 사과담화까지 발표했음에도 최근 국민의 3대 심리,즉 분노(한보의혹).불안(黃長燁비서 망명등).낙담(추락하는 경제)은 아직 여전하기 때문이다.

김현종 <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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