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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히 하신 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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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공직자를 정치적인 공헌도나 충성심에 따라 임명하는 것을 엽관주의(spoils system)라고 한다. 엽관(獵官)은 관직을 얻으려 동분서주하며 서로 다툰다는 뜻이다. 사냥에서 짐승을 잡으려고 아귀다툼하는 모습을 비유한 표현이다.

행정학 교과서는 예외없이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능력보다 정치적 의도나 개인적인 정실이 우선되기 때문이다. 이때 부패와 무능, 비효율의 위험이 커진다는 것이다.

19세기 미국과 영국에선 엽관주의가 성행했다. 당시는 직업공무원 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데다 행정에 전문성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충성심이 더 중요한 덕목이었다.

특히 미국의 제5대 대통령 먼로는 1820년 고위 공무원들이 자신과 임기를 같이해야 한다며 공직임기 4년을 법제화했다. 또 1828년 당선된 잭슨 대통령은 엽관주의를 민주주의의 실천원리로 생각했다. 관직이란 선거의 승리자에게 돌아가는 전리품이라는 논리였다. 이에 따라 한동안 엽관주의는 연방정부뿐 아니라 주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까지 확대됐다.

그러다 1881년 가필드 대통령이 엽관인사와 관련돼 암살당하면서 인사개혁이 시작됐다. 엽관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20세기 들어 실적주의가 제도화됐다.

이제 민주주의 국가라면 실적주의 인사가 상식으로 통한다. 정실을 배격하고 유능한 인물을 등용할수록 정부의 효율이 높아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엽관주의를 100% 물리치기 어렵다. 능력이 엇비슷하다면 '내 사람'을 쓰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또 '코드'가 맞아 말귀를 척척 알아듣는 것이 중요한 능력이 되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선거 한번 치르고 나면 봐줘야 할 사람도 많다. 이 때문에 엽관주의의 유혹은 늘 크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선 특히 정부 산하기관이나 공기업이 엽관주의 또는 낙하산 인사의 주요 무대가 됐던 것 아닐까.

얼마 전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은 "어지간히 하신 분들은 스스로 거취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기업이나 정부 산하기관 임원들을 가리킨 말이라고 한다. 어차피 낙하산들이므로 확 갈아치워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앞으로 또 '어지간히 하실 분'들은 어떤 면모일지 관심거리다.

남윤호 정책기획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