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때부터 문·이과 분리 창의적 인력 못 길러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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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호 20면

기존 산업 포화, 新산업으로 돌파해야
“1970년대에 유선전화를 이용한 화상통화가 기술적으로 가능해졌어요. 하지만 상용화했는데 실패했지요. 사람들에겐 ‘상대방에게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심리가 있는데 엔지니어들이 그것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에 대한 이해는 과학기술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어요.”(서울대 홍성욱 생명과학부 교수 인터뷰 중)

전문가 20명 심층 인터뷰 한국선 왜 융합연구,안 되나

전문가들은 융합연구가 시급하다는 데 한 명도 빠짐없이 동의했다. 가장 큰 이유로 시대 변화를 들었다. 서울대 인지과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김기현(철학) 교수는 “철학자 입장에서 21세기에 대두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지, 즉 사람의 생각에 대한 의문을 푸는 것과 환경 재앙에 관한 것”이라며 “이들 문제를 포괄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선 공학이나 과학뿐 아니라 사회학이나 인문학의 시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정봉현 바이오나노연구단 박사는 “현재의 산업구조는 거의 포화상태”라며 “향후 신산업을 창출하려면 기존 학문의 영역을 뛰어넘는 융합이 필요하다”고 했다.

원광대 한성국(컴퓨터공학) 교수는 자신이 진행 중인 ‘컴퓨터에 의한 언어 이해’ 연구에 대해 “언어학·인지심리학·신경과학·컴퓨터과학 등 여러 분야의 융합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야”라고 설명했다.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장인 서울대 이건우(기계항공공학) 교수도 “정보기술(IT)·생명공학기술(BT)·기계공학기술이 한데 모여 장애인 의료장비를 개발하고 있는데, 장애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동시에 사회·경제적으로 감당할 만한 수준이 어느 정도냐는 공학자의 지식만으로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융합연구의 필요성을 학문 내부에서 찾는 시각도 있었다. 서강대 이덕환(화학) 교수는 “이공계 위기와 인문학 위기가 두 분야 간 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 임형규 신사업부문 사장은 융합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융합 자체가 아니라 보다 상위의 목적을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야 성공적 융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구원 사이에 협동이 이뤄져야 하는데, 실제로는 제목만 받아와 각자에게 나눠 줍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무늬만 융합이고, 실제 내용은 융합이 아닌 게 진행 중인 것이지요.”(서강대 김학수 신문방송학과 교수 인터뷰 중)

실제 연구 현장에서 융합이 생산성 있게 이뤄지고 있다는 목소리는 찾기 힘들었다. 서울대 김영식(동양사학) 교수는 “인지과학이나 진화사회학·진화심리학 등이 초보적 융합 단계에 있기는 하지만 ‘융합과학’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진단했다. 다른 전문가들도 이러한 인식에 동의했다.

“유비쿼터스 컴퓨팅 연구 과정에서 공학·사회학·법학·심리학 전공자들이 함께 작업을 했는데, 커뮤니케이션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서울대 김청택 심리학과 교수)
“서로 같이 모여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너무나 고수해 차이만을 확인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갈 뿐이다.”(서강대 언론문화연구소 박성철 박사)

“융합연구 주제를 개발하고 타 분야와 조직을 구성해 적극적으로 연구에 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한성대 최석두 지식정보학부 교수)

융합연구에 천착하는 젊은 연구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제시됐다. 홍성욱 교수는 “융합에 관심을 갖는 분들은 뭘 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난 이들”이라며 “젊은 선생님들은 전혀 참여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고 전했다. 그는 “호사가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는 과학자들의 연구 환경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곤 한다. 김학수 교수는 “인문학에서 지나치게 이상주의적·가치개입적 사고를 강조하다 보니 미디어를 통해 학습하는 일반대중은 과학과 기술에 부정적이기 쉽다”고 말했다.

'갇힌 연구'에선 혁신 안 나와
“입사자들을 보면 미술을 잘한 사람 중에는 수학과 과학에 담 쌓은 이가 많고, 공대 졸업자는 디자이너적 감각을 갖고 있지 못해요. 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초의 디자이너라고 생각해요. 기술을 알아야 제안도 하고 표현도 하고 아이디어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요?”(LG전자 김진 디자인 경영센터상무)

융합연구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주요 원인으로 전문가 대부분은 교육 문제를 꼽았다. 특히 고등학교 문·이과 분리에 대한 문제 제기가 많았다. 서울대 임지순(물리학)·김영식 교수와 김진 상무 등은 “고교가 문·이과로 나눠져 융합적 사고를 기르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인문·사회학자들이 과학을 표피적으로 이해하거나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문·이과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고 있어 융합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고 했다.

대학 교육에서도 학문 간 장벽이 너무 높다. 연세대 김혁래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식 분과 학문체제가 안착되면서 학문 간 교류가 약해지고 분야별 장벽이 생겼다”고 했다. 전산언어학을 연구하는 서울대 신효필(언어학) 교수는 “학생들에게 통계 강좌를 들어 보라고 했는데 완전히 통계학을 위한 통계학 수업이 이뤄져 ‘접근 불가’더라”면서 “언어학에서 쓰이는 통계학의 특성이나 원리를 설명한다는 목표를 갖고 수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강대 이덕환 교수는 “같은 별을 애기하지만 국문학에서의 별과 천문학에서의 별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융합을 위해 서로를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현실은 인문·사회와 과학·기술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요. 상대방에 대해 무조건 싫고 적대적이었지요.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만나 봐야 과욕인 것입니다.”
이에 따라 융합학과 창설 등의 변화가 시도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유경만 박사는 “융합학과가 만들어지면 너무 세부적 영역을 다루는 학과 이름을 택하게 돼 학생 취업에 제한이 될 수 있고, 학과 내 이해관계 때문에 분과를 하는 데 악용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 결과 “각자가 분업해 왔던 것을 누군가 통합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나 세분화되고 분화돼 통합하는 사람이 없는”(서강대 박성철 박사) 상황이 돼 버렸다. 세계전자문화지도협의회 의장인 고려대 루이스 랭카스터(철학) 초빙교수는 “인문·사회학자가 제시하는 요구조건을 과학 기술자에게 이해시키는 의사소통의 단계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고 말했다.

아울러 학문적 보상은 물론 제대로 된 평가조차 없다는 점이 융합연구의 발목을 잡고 있다. 덕성여대 허인섭(철학) 교수는 “융합이 강조되고 있지만 정작 융합 결과물에 대한 학문적 평가를 받아 본 적이 없다”며 “이런 환경 속에서 계속 그 분야에 관심을 갖고 시간과 노력을 쏟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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