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월街 잇는 색깔 없는 조정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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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호 24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차기 재무장관으로 티머시 가이스너(47)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를 내정한 것으로 정해졌다. 월스트리트는 환호했다. 21일(현지시간) 뉴욕 다우지수는 그의 지명 소식에 힘입어 약 500포인트 급등하며 8000선을 회복했다. 현재 진행 중인 금융권 구제작전이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오바마 경제팀-상무장관 유력한 빌 리처드슨

실제 그는 현 금융위기의 최일선에서 일해 왔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산하 12개 지역 준비은행 가운데 가장 막강한 뉴욕 준비은행을 책임지고 있다. 그는 FRB의 금리정책 결정기구인 공개시장위원회(FOMC) 부의장이기도 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글로벌 신용위기로 번진 지난해 9월 이후 기준금리 인하와 긴급자금 투입에 핵심 역할을 했다.

가이스너는 FRB 결정에 따라 일선 금융회사에 돈을 배분하는 실무 책임자도 맡고 있다.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와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여부를 결정한 ‘심판자’ 가운데 한 명이다. 보험회사 AIG에 구제금융을 투입하고, 투자은행 메릴린치 매각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미 국책 모기지 회사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구제 작전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월스트리트는 그를 헨리 폴슨 재무장관, 벤 버냉키 FRB 의장과 함께 금융위기 최고 대책반 3인방으로 불러 왔다. 케네스 로고프(경제학) 하버드대 교수는 “가이스너가 재무장관에 임명되면 전입교육(OJT) 없이 당장 현안을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도 그 점을 높이 샀다. 위기의 파도가 여전히 너울대고 있는 마당에 현장과 거리가 있는 인물을 재무장관에 앉혀 시장 불안을 증폭시키는 일을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 오바마는 동시에 FRB와의 관계도 고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으로 미국 경제를 되살리려면 시중의 돈줄을 쥐고 있는 FRB의 적극적 도움이 필수적이다. 1980년 이후 재무부보다 우월한 지위를 구축한 FRB를 견제하는 동시에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해야 한다. 오바마의 눈에 가이스너가 적격인 이유다.

양날의 칼
“그는 양날의 칼이다. 월스트리트 실정을 잘 알고 있고 금융위기를 직접 다뤘지만, 동시에 현재 위기와 관련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영국계 금융회사 RBS의 채권 전문가인 스티브 스탠리가 21일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세계적 금융통화 이론가인 찰스 굿하트 영국 런던정경대학(LSE) 교수 역시 지난달 중앙SUNDAY와 인터뷰에서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도록 방치한 것은 엄청난 실수”라고 지적했다. 리먼의 파산으로 금융권 불안이 일반 시민에게까지 확산됐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글로벌 패닉이 발생하고 주가가 폭락했다. 리먼을 구제했더라면 이런 상황까지 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다.

굿하트 교수 등의 평가대로라면 가이스너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핵심 인물이다. 그가 참여한 대책회의에서 ‘리먼 파산, 메릴린치 3자 매각’이 결정됐다. 이 점이 미 의회 인준 과정에서 논란거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쪽이 끊임없이 책임론을 제기할 것이다.

가이스너가 ‘월스트리트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도 약점이 될 수 있다. 그는 현 재무장관 폴슨과 마찬가지로 ‘월스트리트에 좋은 것이 미국에도 이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굵직한 산업과 지역들이 정부의 구제금융에 목매달고 있는 가운데 ‘금융위기 주범은 월스트리트’라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중이다.

가이스너를 옹호하는 목소리도 크다. 그가 지난해 8월 이후 서브프라임 사태의 심각성을 제기하며 FRB의 적극적 대처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다수결 원칙을 따르는 FOMC에서 서브프라임 사태를 경시하고 인플레이션 우려에만 주목했던 사람들의 목소리에 눌렸을 뿐이라는 게 그를 위한 변론의 요지다. WSJ는 최근 알려진 것과 달리 가이스너가 ‘리먼을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리먼 파산은 구제금융 투입을 강력히 반대한 폴슨 장관의 고집 탓이었다는 것이다.

가이스너는 색깔이 뚜렷한 인물은 아니다.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은 “자기 주장을 고집하기보다 팀워크를 중시한다”고 평했다. 이런 성격 덕분에 FRB와 오랜 갈등·경쟁 관계였던 폴슨 재무장관과 호흡을 척척 맞출 수 있었다. 오바마가 지향하는 경제정책을 현장에서 묵묵히 수행하기에 딱 알맞은 인물이라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개혁보다는 위기 진화
그래서 대공황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의 재무장관인 헨리 모겐소 2세와는 다르다는 평이 나온다. 모겐소는 34년부터 45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재무장관을 역임하면서 뉴딜정책을 야전에서 지휘했다. 구제(Relief)와 부흥(Reconstruction), 개혁(Reform)으로 이어지는 공황 극복의 전 과정을 아울렀다.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은 그가 구제 단계를 잘 처리해 주면 오바마가 만족할 것으로 보고 있다. 위기 여파로 부실해진 금융·자동차회사 등과 실직자들을 구제하는 것이다. 발등의 불은 ‘1차 공적자금을 수혈받고 계속 흔들리는 금융회사들을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이다. 또 80년대 초 더블딥(이중침체) 이후 가장 많아진 실직자를 구제해야 한다. GM·포드·크라이슬러 등 자동차 3사에 대한 구제금융이 이번 의회에서 결정되지 않으면 그에게 공이 넘어간다.

이 모든 일은 위기 극복 과정에서 초기에 해당한다. 야구로 말하면 상대 타선(위기)의 연타 행진을 막기 위해 투입된 스토퍼(Stopper)쯤 되는 셈이다. 그가 잘하면 위기로 망가진 미 경제를 소생시키는 작업까지 맡을 수도 있다.

누리엘 루비니(경제학) 뉴욕대 교수는 “오바마가 미 경제구조를 다시 짜는 과정까지 가이스너가 재무장관을 맡을 가능성은 작다”고 말했다. 그가 월스트리트와 너무나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개혁 대상이면서 그의 친정이나 다름없는 월스트리트를 향해 칼날을 겨눌 수 있을지 의문시된다는 것이다.

가이스너는 재무장관 자리를 놓고 경합한 서머스 전 재무장관과 마찬가지로 루빈 사단의 일원이다. 재무부 국제담당 중간간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루빈에 의해 발탁돼 재무부 차관을 지냈다.

중국어·일본어 할 줄 알아
그는 눈앞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도 침착하게 대응할 줄 안다. 아넷 라자레스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은 “그는 복잡한 여러 가지 현안을 한데 묶어 핵심 부분을 찾아내 문제를 술술 풀어갈 줄 아는 사람”이라고 뉴욕 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말했다. 라자레스는 재무부 근무 시절 가이스너와 함께 일했다.

가이스너는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발탁됐지만 당파적 성향은 강하지 않다고 NYT는 보도했다. 민주당에 가까운 경제통 가운데 중도파로 분류된다. 공화당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 의회를 설득하는 데도 남다른 재능을 보일 것으로 관측된다.

그는 대학에서 금융을 공부하지 않았다. 학부 시절에는 국제관계를 전공한 뒤 대학원에서 국제경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금융업무에 대해 풍부한 지식과 노하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이스너는 과거 재무부 근무 시절 국제업무를 담당했다. 88년 재무부에 첫발을 내디딘 뒤 2002년 국제담당 차관보를 마칠 때까지 그가 맡은 일은 미국 국경 밖 현안들이었다. 94년 멕시코 사태와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 선언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가 중국과 일본에서 살았던 경험은 큰 도움이 됐다. 한마디로 그는 재무부 내 동아시아 전문가였다. 오바마는 그의 중용에 이 점도 감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이스너를 내세워 중국 위안화 절상 등 미·중 경제현안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가이스너는 한국의 외환위기 와중에 미 정부의 입장을 국제통화기금(IMF)에 전달하는 창구였다. 이는 한국이 구제금융을 받은 뒤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IMF 이면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구실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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