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늑대처럼 되살아나는 야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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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호 14면

보름달 속에 선명하게 드러난 늑대의 머리는 흑백의 명암만으로 표현돼 있어 한눈에도 강한 인상을 준다. 특히 인간의 중심을 깊이 노려보는 듯한 두 눈은 두렵기까지 하다. 이 독특한 레이블은 미국 소노마(Sonoma) 지역의 아름다운 계곡에 위치한 켄우드(Kenwood)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와인 ‘잭 런던(Jack London)’이다.

와인 레이블 이야기 <12>

켄우드의 포도밭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언덕 아래로 포도나무들이 길게 가로로 놓여 있다. 포도밭 아래쪽에는 양조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속에는 와인을 숙성시키기 위한 1400개 이상의 프랑스·미국산 오크통들이 숨쉬고 있다. 이들 중에는 한때 미국인들의 우상이었던 잭 런던의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들로 만든 와인도 섞여 있다.

우리에게 작가로 유명한 잭 런던은 탐험가이면서 또 여행가였다. 자연을 좋아했던 그는 포도농장이 있던 현재의 글렌 엘렌 마을 근처를 들렀을 때 마음에 드는 농장을 발견하고, 당시 발표했던 소설 『야성의 부름(Call of the wild)』의 성공으로 얻은 경제력을 주저 없이 투자한다.

아름다운 ‘달의 계곡’에 최초 130에이커의 포도 농장을 시작한 이래로 1916년 40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모두 6개의 농장을 확보하면서 와인에 대한 꿈을 성장시켜 왔다. 잭 런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농장은 잠시 어려움에 처했지만, 다행히 오랫동안 함께 농장을 가꿔온 이복누이 덕분에 양차대전을 지나 59년까지 농장을 지킬 수 있었다. 이후 나라에 헌정, 잭 런던 공원으로 만들었다.

70년대에 켄우드가 잭 런던의 농장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복누이의 증손자인 밀로 셰퍼드가 달의 계곡에 남아 있는 가족 명의의 포도밭에 포도나무를 심으면서부터다. 이 땅은 잭 런던이 오래 전에 포도나무를 심기 위해 일궈 놓은 곳으로 이곳에서 수확한 최상급의 포도는 결국 바로 옆에 위치한 켄우드 농장과 독점으로 포도 공급 계약을 하게 된다.

달의 계곡에서 처음 포도 농장을 시작해 와인을 생산했던 잭 런던의 이상과 켄우드 와이너리가 만난 의미를 기념해 켄우드는 78년부터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시작으로 잭 런던의 책을 표시하는 장서표였던 늑대의 머리를 레이블로 사용한다.

그 후 잭 런던의 포도밭에서 생산되는 다른 품종 와인 역시 켄우드가 독점해 87년부터는 진판델 와인, 90년부터는 메를로 와인에까지 강력한 인상을 주는 늑대 레이블을 사용해 ‘잭 런던 시리즈’로 생산되고 있다. 이것이 달의 계곡에 늑대들이 살게 된 역사다.

필자는 몇 년 전 켄우드 와이너리를 방문했을 때 오래된 참나무 아래 긴 나무식탁 테이블 위에서 그 선명한 흰색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늑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잭 런던은 늑대를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늑대는 스스로를 인간과 더불어 잘 살아가는 늑대 개가 되었다고 착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도 잊고 있던 본성이 한밤중 동료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어난다. ‘야성의 부름’을 받은 늑대 개는 그날 밤 묶인 사슬을 끊고 자신의 고향으로 달려간다.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지만 힘차게 달려 다시 늑대가 됐고 비로소 자유를 찾게 된다.

우리들 각자는 어느 날 스스로의 본성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 자신들에게 얽혀 있는 사슬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나만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필자는 그날 저녁, 계곡에 하얀 달이 뜰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벅차게 자유를 향해 달려가는 늑대의 모습을 천천히 떠올리면서. 물론 감성적 야성이 살아 있던 잭 런던 와인과 함께.


『김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김혁의 프랑스 와인 명가를 찾아서』『김혁의 이탈리아 와인 기행』의 저자인 김혁씨는 예민하면서도 유쾌한 와인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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