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질문에 그 답변 ‘판박이 국감’ 악순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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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06년 10월 20일 국회 건설교통위원회의 한국철도공사 국정감사장.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이 철도공사 이철 사장을 다그치고 있었다. 심 의원은 “부채로 허덕이는 상황에서 직원 말고 가족한테까지 무임 승차권을 발급하는 건 심하지 않으냐”고 따졌다. 이 사장은 “더 줄이는 방법으로 노력하겠다”며 머리를 숙였다.

그로부터 꼭 2년 뒤인 지난 17일. 국토해양위의 철도공사 국감장에선 2년 전과 똑같은 장면이 되풀이됐다. 질의하는 의원과 사장의 얼굴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한나라당 윤영 의원=“규정이나 지침을 마련해 (직원이나 가족들의) 무임 승차를 대폭 줄이세요.”

▶철도공사 강경호 사장=“알겠습니다.”

해마다 국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의원은 매년 지적되는 문제를 재탕하고, 피감 기관은 “노력하겠다”며 피상적인 답변만 되풀이하는 모습이다.

이뿐 아니다. ▶하이패스 통행료 미납 ▶고속도로 휴게소의 불공정 계약 등은 건교위(현 국토해양위)의 ‘단골 메뉴’다. 국회 경력 10년차인 한 보좌관은 “국감 시즌이면 이전 국감에서 히트 친 자료를 재가공하는 게 일종의 관례”라고 털어놨다. 그래서 일각에선 ‘국정감사=표절감사’란 말까지 나온다.

왜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걸까.

우선 국회 차원의 사후 검증시스템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국감이 끝나면 상임위별로 시정 의견을 내고, 몇 달 뒤 피감 기관으로부터 처리결과 보고서를 받는 게 전부다. 그나마 보고서를 내도 이를 확인하는 절차가 없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는 “국감 이후 상임위 차원의 스크린(검증) 절차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피감 기관의 실질적 개선을 유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정부는 시정요구를 받은 사항을 지체 없이 처리해야 한다(16조 3항)’고만 돼 있을 뿐 처리 시한은 물론 사후 감사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서 교수는 또 “국감이 끝나면 곧장 예산 심의로 들어가는 촉박한 국회 일정도 문제”라고 말했다. 국감(9~10월)과 정부의 보고서 제출 기간(이듬해 2~3월)의 격차가 커 국감 결과를 예산 심의에 반영하기가 사실상 힘들다는 지적이다.

의원들의 잦은 상임위 변경도 문제로 지적된다. 의원들은 통상 2년마다 상임위를 바꾸는 게 관례다. 그러다 보니 이전 국감에서 제기했던 문제에 대한 책임 있는 추적이 어렵다는 게 대다수 의원의 설명이다. 2006년 철도공사의 무임승차 문제를 지적했던 심재철 의원은 “건교위 소속으로 문제를 지적했지만 이듬해 문광위 소속으로 바뀌어 지속적인 감시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국감 손질하자”=정치권에선 “국감을 보완하자”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17일 “20일 동안 500개가량의 기관을 감사하는데 제대로 질문이 되겠느냐”며 “새 국회상 정립을 위해 국감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감 혁신을 위한 정책제안서를 낸 김성태 의원(한나라당)은 “피감 기관의 안일한 자세도 문제지만 지적만 하고 사후 감시는 하지 않는 의원들의 태도도 문제”라고 말했다.

사후 조치가 미진한 피감 기관에 불이익을 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이지현 팀장은 “개선이 미진한 피감 기관에 대해 예산 배정 등에서 페널티를 주는 방안도 검토해 볼 만하다”고 제안했다.

정강현 기자

언론인 출신 의원이 본 국감

“따발총처럼 읽어도 질의시간 부족
창 무뎌지고 방패는 더 강해진 느낌”

한나라당 신성범 의원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만 살아서 떠들고 있어.”

KBS 기자 시절의 일이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 국감장을 나온 보도국장은 무척 흥분해 있었다. 내가 취재 중이란 걸 알고는 하소연을 시작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설명해 봐야 안 통해. 들은 척도 안 하고 호통만 쳐.” 공영방송인 KBS는 국감의 피감 대상이다. 국회의원이 돼 감사장에 들어설 때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증인석에 앉아 있는 정부 부처의 간부 공무원들을 살펴본다. 이들에게 ‘무식한 국회의원’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현실의 벽은 바깥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우선 의원 한 사람에게 할당된 응답 시간은 기본질의 10분에 보충질의 10분(혹은 5분)이 고작이다. 몇 마디 묻고 답변을 듣다 보면 마이크가 꺼지기 일쑤다. 의원들은 “따발총처럼 읽어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기자 시절 국감을 취재할 때는 의원들이 왜 비슷한 질문을 하는지 답답했다. 하지만 사안의 경중과 완급에 대한 판단이 다른 상황에서 사전 조정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나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대한 질문권을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특히 언론에 보도될 가능성이 높은 주제는 의원들 전체가 달라붙다시피 한다. 앞으로도 국감이 정책 위주로 가느냐, 갈등 위주의 정쟁 국감으로 가느냐는 결국 언론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주간 국감에서 가장 크게 느낀 건 의원과 정부부처 간 정보 격차였다. 행정부의 자료 제공이 과거보다 나아졌다는 평가지만 개별 의원 입장에선 부처와의 정보 비대칭성을 좁힐 수 없었다. 게다가 관료들은 오랜 경험으로 국감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호통치는 의원을 어떻게 다룰지 체득하고 있었다. 국회의 ‘창’은 무뎌진 반면 정부 ‘방패’의 방어력은 더욱 강화됐다는 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게 국정감사 위기론과 무용론이 나오는 배경일 게다. 그러나 일선 공무원들조차 탁상위주 행정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국감의 유용성을 인정한다.“물론 귀찮지요. 그러나 국감이라도 있으니 우리 공무원들이 국민 입장에서 정책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석에서 만난 정부부처 간부의 솔직한 답변이었다.

(경남 산청-함양-거창, 전 KBS 기자)

“여야 가릴 것 없이 서로 네 탓 공방
피감기관 부실한 자료 제출도 문제”

민주당 장세환 의원

 국회의원이 된 뒤로 처음 겪은 국정감사는 부풀었던 기대만큼이나 실망도 크다. 물론 국감의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문화체육관광부가 이명박 정권에 비판적인 네티즌을 체계적으로 감시해 하루에 두 차례씩 검찰·경찰·국세청 등 관계기관에 보고를 했다는 사실 등은 아마 국감이 아니었다면 밝혀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론 미진한 감을 지울 수 없다. 과거 일선 취재기자 시절 보고 느꼈던 문제점을 의원이 돼서도 똑같이 보고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이건 잘못이다. 진정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고 싶다면 국회는 달라져야 한다.

국감의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점이다. 1년에 한 번인 국감인데 첫 질의와 추가 질의를 합해서 실제 발언시간은 10분 안팎에 불과하다. 행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국감을 내실 있게 하려면 지금보다 발언시간을 최소한 세 배는 늘려야 한다.

둘째, 야당 의원에 대한 피감 기관의 부실하고도 무성의한 자료 제출과 답변 태도도 걸림돌이다. 요구한 자료가 대부분 국감이 임박해서야 제출되는 바람에 심도 있는 분석을 어렵게 했다. 이조차 요구한 자료의 60~70%밖에 되지 않는다. 민감한 자료는 ‘없다’거나 ‘타 부처의 일’이라는 등의 변명으로 일관한다. 답변 역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말하기에 적절치 않다’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기 일쑤다.

셋째, 피감 기관에 대한 여당 측의 지나친 보호도 야당을 힘들게 한다. 국정감사는 국민을 대신해 행정부의 잘잘못을 따지는 자리다. 피감 기관을 너무 감싸고 도는 것은 국회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킬 뿐만 아니라 의원의 기본적인 의무도 지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여야 가릴 것 없이 서로 ‘네 탓’공방만 벌이는 일이다. 국감장에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너만 잘못했다’는 견강부회가 판치는 것은 과거 기자 시절이나 초선 의원이 된 지금에 와서 느낌이 어찌 그리 똑같은지. 여야 모두 ‘나도 잘못했다’고 고백할 줄 아는 겸손과 용기가 필요하다. 소모적 정쟁을 줄이기 위해 여야 의원들의 의석을 섞어 배치하는 것도 검토해 보자.

(전북 전주 완산을, 전 한겨레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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