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쓰는가정문화>14.원칙은 지키면 손해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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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주부 김영옥(36.경기도고양시일산2동 중산마을)씨는 얼마전 집에 피아노를 사들이면서 묘한 세상 경험을 했다.딸애 피아노를아파트 7층 집까지 엘리베이터로 올리려고 하는데 경비실 아저씨가 달려와 말렸다.엘리베이터 이용제한 중량을 훨 씬 넘어 엘리베이터의 고장원인이 될 수 있으니 곤돌라를 쓰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렇겠다 싶어 관리사무실에 2만원을 내고 곤돌라를 써서피아노를 집에 들일 수 있었다.그러나 집에 찾아온 옆집 아줌마들은 金씨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경비아저씨야,담배 한두갑 사주면 되는데….2만원씩 곤돌라비를 내요?』『요령이 있어야지요.』 갑자기 뭔가 손해본 것같고 자기만 세상물정에 어두운게 아닌가하는 자책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金씨는 털어놓았다.
과연 그럴까.원칙대로 지킨 주부 金씨가 융통성없는 사람일까.
사회단체 관계자들은 우리생활속에 만연한 질서며,원칙이며,심지어법까지 어기는 것을 예사로 아는 이런 풍토를 개탄한다.
특히 우리생활과 교육의 기본 장(場)이라 할 가정에서부터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함을 지적한다.워낙 분위기가 서로 「자기 편한대로만」 흐르다 보니 지킬 것을 지킨 사람이 되레 바보가 되고 문제가 있는듯 느껴지는 현실이라는 것. 주부 권옥순(45.서울양천구목동)씨는 요즘 고민거리가 하나있다.아파트의 내력벽을 허물고 내부를 바꾸는 것은 엄연한 위법이지만 이웃 몰래,또는 이웃이 눈감아줘 공사하는 일이 관례가 돼있기 때문.최근에는 옆집이 내부공사를 크게 하다 말썽이 됐는데 그 집 아줌마나 공사업자가 오히려 이웃들을 나무라더라는 것. 『좀 눈감아주면 되는데 왜 까다롭게 구느냐』는 말에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렇다고 고발할 수도 없어 냉가슴을 앓고 있다.
한국여성개발원 복지가족실 변화순실장은 『이런 원칙 안지키는 풍토가 나만 아는 이기주의와 성숙한 시민의식의 결여에서 비롯되고 있다』면서 『지킬 것을 안지키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내가 해를 입는 것으로 되돌아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고 환기한다.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산다면 스스로도 살기 힘든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3년여 살다온 주부 김은선(36.서울강남구대치동)씨는 『예전에는 그러려니 했던 우리사회의 무원칙이 정말 싫어진다』고 말한다.
예컨대 이웃 친지와 인사를 나누는 것은 인간생활의 기본임에도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지키는 이들을 찾아보기 어렵더라는 것.아이들 학교에서는 「학교 건널목을 지켜주는 녹색어머니에게 인사를합시다」라는 통지문을 보내지만 실제로 녹색어머 니에게 아침인사를 하는 학생은 한명도 없는데에 충격을 받았다.일본에서는 이들봉사자에게 등하교때 모든 학생들이 다정히 인사하는 것을 보았기때문. 심지어 비오는 날 보행지도를 하는 녹색어머니에게 자가용으로 딸을 등교시키던 한 학부모가 자신의 차를 빨리 통행시키지않는다고 욕설까지 해대는 것을 보고서는 아예 할 말을 잃었단다. 주부들은 이런 원칙실종의 사회가 특히 자녀들 교육에 미칠 악영향을 걱정한다.어린이의 손을 잡고 버젓이 무단횡단을 하는 부모,지하철 승차 줄을 보고도 옆에서 어정거리다 재빨리 새치기하는 중년들로 넘쳐나는 사회,「기살리기」에 눌려 가 정교육마저찾아보기 힘든 현실에서 원칙은 바른생활 시험지의 모범답안으로만남았을 뿐이다.
주부 임형순(42.서울송파구잠실동)씨는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애가 쓴 글을 보고 얼굴이 뜨거웠다고 한다.얼마전 딸애와 버스를 타고 가다 딸애가 다리 아파하길래 노인이 서있는데도 딸애 보고 빈자리에 앉으라고 했는데 딸애가 굳이 자리를 양보하고 그것을 뒤에 글짓기로 썼더라는 것.엄마도 말과 행동이 달라 실망했다는 것이 그 글짓기의 요점.
『좀 손해보더라도 옳은 일은 애들에게 하라고 해야지요.』주부임씨의 결론이다.
박신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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