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82>張學良의 반세기 연금생활<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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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장쉐량, 쑹아이링(쑹메이링 큰언니), 위펑즈(于鳳至·장쉐량 부인), 쑹메이링, 장제스 김명호 제공

시안사변(1936)과 항일전쟁(1937), 항일전쟁의 승리(1945)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은 하나로 연결된 사건들이다. 출발점은 시안사변이었다. 발생에서 수습까지 2주가 채 걸리지 않았지만 그 진동은 중국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한때 천하를 삼분했던 장쉐량(張學良), 장제스(蔣介石), 저우언라이(周恩來), 마오쩌둥(毛澤東) 등 사변의 주역들은 삼국지를 능가하는 수많은 사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특히 장쉐량의 반세기에 걸친 감금생활은 세기가 바뀐 후에도 사람들의 눈을 붉게 만들었다.

시안사변은 중국의 합법적인 2인자였던 장쉐량이 1인자 장제스를 무력으로 감금하고 협박한 사건이었다. 두 사람은 시국을 보는 눈이 달랐다. 장쉐량은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단하고 국·공 양당이 합작해 침략자 일본과 전쟁을 해야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장제스는 공산당을 소탕한 후에 일본과 일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사변이 발생하자 쑹메이링은 오빠 쑹즈원과 함께 시안으로 향했다. 저우언라이도 옌안을 출발했다. 장제스의 처남 쑹즈원은 시안을 두 번 오갔다. 둘 중에 하나만 죽어도 큰일이었다. 어쩌면 둘 다 죽을지도 몰랐다. 말이 좋아 협상이지 굽혀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을 달래기에 바빴다. 결국 장제스는 장쉐량의 요구를 수용했다.

12월 25일 오후 장제스는 풀려났다. 그날따라 바람이 심했다. 음산한 냉기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게다가 황혼 무렵이었다. 을씨년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풍을 맞으며 비행기 앞에 선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손을 휘저으며 빨리 가라고 했다. 장쉐량이 한 걸음 다가서며 함께 가겠다고 했다.

장제스는 말렸다.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옆에 사람들이 있건 말건 개의치 않았다. 장쉐량은 “에이” 하며 그냥 비행기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장제스는 무사히 시안을 떠났다. 장쉐량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뒤늦게 달려온 저우언라이는 발만 동동 굴렀다. 옌안에서 마지막 숨을 허덕이던 공산당은 장쉐량 덕에 기사회생했다. 장제스도 후계자로 여겼던 장쉐량에게 망신을 당하기는 했지만 공산당까지 자신을 최고지도자로 옹립하는 바람에 위상은 시안사변 전보다 더 올라갔다.

12월 31일 장쉐량은 난징의 특별군사법정에 섰다. 재판부는 징역 10년에 5년간 공민권 박탈을 선고했다. 다음날 장제스는 군사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부위원장 장쉐량의 특별사면을 국민정부에 요청했다. “군사위원회가 신변을 인수해 엄격히 관리 단속한다”는 조건으로 비준했다. 장쉐량의 거처를 헌병과 특무요원들이 물샐틈없이 에워쌌다. 장쉐량의 동생 쉐밍은 형을 보러 왔다가 만나지 못하자 발길을 옌안으로 돌렸다. 쉐밍은 후일 인민해방군 잠수함사령관이 되기까지 저우언라이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은 장쉐량을 장제스의 고향 시커우에 있는 중국여행사 초대소로 이송했다. 30여 명이 번갈아 가며 24시간 감시했다. 장쉐량과 말을 나누지 못하도록 표준어를 못하는 특무요원들을 배치했다. 조장은 황포군관학교 출신 육군 중위였다.

장제스는 시안에서 장쉐량의 안전을 보장했다. 저우언라이에게도 그랬고 부인과 처남에게도 같은 말을 했지만 장제스는 약속을 어겼다. 장쉐량은 이 두 남매와 유난히 친했다. 쑹메이링은 말할 것도 없고 쑹즈원과는 못할 말이 없는 사이였다. 부인 쑹메이링은 펄펄 뛰고 처남 쑹즈원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매부 욕을 퍼부어댔다.

시안사변은 모든 합의를 구두로만 했다. 문서를 한 장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러나 당사자들 간에 얽히고설킨 은원(恩怨)만 알고 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건이다. 반세기에 걸친 장쉐량의 감금생활도 마찬가지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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