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한만년 일조각 대표 별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원로 출판인 한만년(韓萬年) 일조각 대표가 지난달 30일 오후 10시 서울대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79세.

서울 태생인 고인은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948년 탐구당에 입사해 출판 일을 배웠고, 5년 뒤 일조각을 설립해 그때부터 단행본 출판의 외길을 걸어왔다. 이기백 전 서강대 교수의 '한국사 신론', 고(故) 양주동 교수의 '고가(古歌)연구' 등 1500종의 학술서가 고인의 손길을 통해 차례로 세상에 나왔다.

이런 활동에 힘입어 일조각은 을유출판사와 함께 70년대 전후 대표적인 명문출판사로 자리를 굳혔다. 고인은 출판계의 높은 신망을 바탕으로 대한출판문화협회장을 여섯차례나 지냈다.

몇년 전부터 폐암과 이로 인한 합병증으로 건강이 악화됐는데도 고인은 몸이 잠시 좋아지는 짬짬이 출판계 후배들과 자리를 함께 하며 출판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지난해에는 박맹호 민음사 대표, 전병석 문예출판사 대표, 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 이기웅 열화당 대표 등과 점심을 하며 "출판업은 정말로 쉽지 않다. 그게 출판의 매력인지도 모른다"고 감회를 털어놓았다. 이 자리에서 후배들은 신간 '잘 먹고 잘 사는 법' (김영사)을 선물로 전달해 출판 원로의 쾌유를 비는 뜻을 대신했다.

고인에 대해 이기웅 대표는 "그 어른은 나를 포함한 모든 후배들의 우상"이라는 말로 압축해 표현했다. 출판인으로서 보인 품위가 그렇고, 출판인으로서 발휘한 전문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고인은 평소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좋은 책을 만들려면 편집자의 눈높이가 필자들과 같거나 오히려 더 높아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94년 펴낸 자신의 수필집에 '일생일업(一生一業)'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출판을 평생의 업으로 여겼던 고인의 뜻에서였다.

고인은 헌법학자 현민 유진오 박사의 둘째 사위다. 박동진 전 외무장관은 그의 손아래 동서. 한만청 전 서울대병원장은 그의 친동생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효숙(74)씨와 모두 대학교수인 성구(成九.서울대 의대).경구(敬九.국민대).준구(準九.서울대 의대).홍구(洪九.성공회대).승미(承美.연세대)씨 등 4남1녀가 있다.

발인은 4일 오전 8시이며, 장지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선영. 02-760-2091

조우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