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더 내 애국을” “그게 무슨 애국이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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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 07면

“존 매케인과 버락 오바마는 금융시장보다 화성(Mars)을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
뉴욕발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공화·민주당의 대선 후보들이 침묵하는 데 대해 월스트리트 저널이 17일자 사설에서 비꼰 말이다. 두 후보는 이달 초 금융위기가 격화되는 상황에서 선거자금 모금과 지역 유세에 매달렸다. 경제 관련 논쟁이라고 해 봤자 매케인의 ‘펀더멘털 발언’(15일 유세에서 “미 경제는 기본적으로 튼튼하다”고 말함)을 놓고 실랑이를 벌였을 뿐이다.

‘총사령관’→‘경제대통령’ 이슈 이동

그러나 18일부터 상황은 확 달라졌다. 월스트리트가 무너지고 미·일·유럽 등 주요 6개국 중앙은행이 세계 금융시장에 1800억 달러를 긴급 투입하겠다고 발표한 날이었다. 미 언론들은 연일 “1930년대 대공황 이래 최대의 경제위기”라고 보도했다. 미 정부가 이번에 금융위기를 막기 위해 쏟아 붓는 돈은 1조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1989년 저축대부조합(S&L) 위기 때 투입한 2000억 달러의 몇 배나 된다.

두 후보의 공방전은 달아올랐다. 전쟁영웅 출신 매케인이 침묵을 깼다. ‘경제에 무지한 후보’라는 공격을 의식했는지 “내가 대통령이라면 공공의 신뢰를 저버린 증권거래위(SEC) 위원장을 해임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SEC 위원장은 공화당 하원의원 출신의 크리스토퍼 콕스다. 매케인 진영으로선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독자적인 처방을 내놓으려는 시도였다. 매케인은 그동안 ‘월스트리트가 카지노로 전락했다’고 주장해 왔다.

오바마는 즉각 맞받아쳤다. 그는 이날 뉴멕시코 유세에서 “앞으로 47일 후(투표일인 11월 4일) 우리를 재앙의 길로 끌어들인 한 사람만 제거할 것이 아니라 부시 행정부 전체를 해임하자”고 말했다. 그러면서 매케인을 비난했다. “26년간 공화당 정책을 지지한 사람이 일주일간 고함을 친다고 모든 걸 지울 수 없다.”

두 진영은 세금 문제로도 격돌했다. 오바마의 러닝메이트인 조셉 바이든 상원의원은 ABC TV와의 인터뷰에서 연 소득 25만 달러 이상의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올리는 대신 중산층의 감세 폭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이든은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그것이 애국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매케인은 “세금을 더 내는 게 애국의 길도, 명예로운 배지도 아니다”며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반박했다.

이제 미국 대선은 경제 이슈로 총력전을 펼치는 양상이다. 오바마의 변화 구호, 매케인의 페일린 카드에 이어 세 번째 고비다. 민주국가에선 경제난이 심할수록 정권교체 가능성이 크다. 1932년 대선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둔 게 대표적 사례다. 로널드 레이건(1980년 대선)과 빌 클린턴(92년 대선) 역시 경제 이슈로 승기를 잡았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15일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지 이틀 만에 오바마의 지지율은 매케인을 앞섰다. 재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18일 CBS와 뉴욕 타임스의 여론조사 결과 오바마 48%, 매케인 43%였다. 경제 이슈는 이라크전쟁 철군 로드맵, 북한·이란 핵 문제를 뒷전으로 밀어냈다. 미국 유권자들은 ‘총사령관’보다 ‘경제대통령’을 원하는 분위기다.

최대 관심은 작은 정부와 규제 완화를 둘러싼 논쟁에 쏠리고 있다. 차기 정권에서 미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말해주기 때문이다.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가 흔들리고, 미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두 후보는 묘책을 짜내느라 바쁘다.

오바마 측은 중산층·서민 보호를 강조하고 있다. “매케인이 당선되면 부시 3기 정부가 될 것”이라며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재무부가 주택 시장의 신용 흐름을 유지할 특단의 안정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 규제 강화, 유동성 공급 확대, 주택 보유자의 모기지 연장을 주장했다. 그는 18일 뉴멕시코주 유세에서 “이 정부와 이 정부의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철학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개입·규제 확대를 뜻하는 말이다.

매케인 역시 월스트리트 개혁과 규제 정비를 통해 금융위기에 맞서자고 호소하고 있다. 그는 “오바마야말로 주택금융 위기 발생 때 의회에서 침묵했다”며 “금융위기를 막기 위해 과연 무슨 노력을 했느냐”고 반격했다. 매케인은 모기지·금융기구(MFI)를 설립해 민관 합동으로 금융시장을 재정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금융기관들이 지급 불능 사태를 맞기 전에 구제해야 한다”며 “오바마는 금융위기를 정략적으로 활용하는 ‘나 우선(me-first), 국가 나중(country-second)’의 정치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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