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 ‘과거’를 치유하는 이야기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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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어둠 속의 남자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열린책들, 256쪽, 9800원

 때로 사람들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현재를 살지 못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걸까’를 끊임없이 되뇌이며 고통스러워 한다. 이들에게 현실은 두 개다. 과거의 연속과 있는 그대로의 현실.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그 상처들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나.

폴 오스터(60·사진)의 신작 『어둠 속의 남자』가 해답을 줄지도 모른다.

얼마 전 아내를 잃은 데다 교통사고까지 당한 브릴은 딸 미리엄, 손녀 카티아와 함께 살고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을 견디기 위해 브릴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술사 브릭이다. 어느 날, 깊은 구덩이로 떨어진 브릭은 ‘내전이 터진 미국’이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날벼락 같은 명령도 떨어진다. “이 모든 게 누군가의 상상 때문이니 그 상상을 하는 작자를 죽여야 한다.”

그 ‘상상하는 작자’는 다름아닌 브릴이다. 브릴과 브릭의 싸움이 진행될수록 독자들은 알게 된다. 마술사 브릭은 다름 아닌 브릴이 가진 고통스러운 ‘과거’의 모습임을. 고통스러운 기억과의 싸움은 브릴만의 것이 아니다.

“제가 ‘끔찍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버지한테 듣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미리엄은 남편에게서 버림 받았다. 카티아는 남자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이라크에서 납치된 남자친구는 처참하게 살해됐고, 동영상은 미국 전역에 퍼졌다. 카티아는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마약에 중독된 듯 영화를 본다. “할아버지, 저에겐 그 기억을 지울 다른 이미지들이 필요해요.”

브릴과 미리엄과 카티아는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의 상처를 매만진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할아버지와 손녀가 침대와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소설의 절정이다. 이야기의 ‘나눔’은 그 어떤 약보다 훌륭하다. 사랑했던 여자, 상처 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용서 받기 위해 몸부림쳤던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 남자친구의 죽음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려왔던 카티아가 스스로를 기억에서 해방시키는 것도 이즈음이다.

“현실이라는 것은 단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야. 많은 현실이 있는 거야. 단 하나의 세상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세상이 있는데 그것들이 서로 평행하게 달리고 있어. 각 세상은 다른 나라에 가 있는 누군가가 꿈꾸고 상상하고 저술하는 바 그대로의 세상이라고. 각각의 세상은 마음의 창조물이라, 이 말씀이야.”

소설 속 인물을 통해 폴 오스터가 말하고 싶은 바는 분명하다. 각각의 세상은 마음의 창조물이다. 고통도 행복도 모두. 그러므로 극복할 것. 그리고 행복할 것.

이야기는 “이 괴상한 세상은 계속 굴러간다”는 정의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소설의 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은 독자들은 아마도 소설 중반에 등장했던 이 말을 떠올릴 것이다.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라.”

책을 덮으면 아마도 당신에게 이야기를 털어놓던 누군가의 따뜻한 손과 떨리던 목소리를 떠올릴지 모른다. 어떤 이야기였는지 기억하지 못해도 좋다. 그 순간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서로 “행복하길 바랐”다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원제 『Man in the dark』. 

임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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