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일담 영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선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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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80년대 학생운동권의 후일담을 다룬 영화가 선보인다.모스크바국립영화학교에 한국학생으로는 처음 유학간 김응수(31)감독의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가 그것.문학에서는 공지영의 『고등어』를 비롯해 90년대 초반에 후일담 소설들이 쏟아 져 나왔지만 영화는 처음이다.
루이 알튀세의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딴 제목이암시하듯 영화는 시대가 바뀌어도 과거 때문에 고통받는 운동권 출신들의 얘기다.등장인물은 서른살을 맞은 세쌍의 남녀.이들은 유학등 각기 다른 이유로 러시아에 왔지만 공유하 는 한가지 끈이 있다.과거 동료의 죽음에 대한 저마다의 죄책감이다.김중기는자신이 고문에 못이겨 비밀을 불었기 때문이라고 괴로워한다.그러나 진짜 책임의 소재가 있는 사람은 다른 인물이다.그는 아직 트로츠키의 책을 읽고 있는 김중기의 친구로 결국 권총 자살로 고통에서 벗어난다.고시에 합격해 외교관으로 러시아에 와 있는 친구도 겉으론 자유로운 것 같지만 부채의식을 갖고 있다.이들 세 남자와 아내 혹은 연인 사이로 대응되는 여자들도 운동권 출신이며 과거의 기억을 공유한다.
영화는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운동권 출신들끼리의 기억과 현재로 이어진다.그리고 배우들도 모두 실명으로 등장한다.
김응수 감독은 서울대 심리학과 84학번으로 87년 총학생회 홍보부장을 맡았던 인물이며,남자 주인공 김중기는 88년 남북청년학생회담때 남쪽대표였다.영화에 등장하는 직업배우는 김중기의 권유로 출연하게 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김 선재가 유일하다.물론 배우들은 모두 무료로 출연했다.제작과정에서부터 대중을 위한 흥행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일기를 쓰듯 자신들의 진솔한생각을 담아보자는 의도가 엿보인다.영화는 그 의도만큼 정직하고진지하다.그러나 동시에 현재의 일반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전하기엔 지나치게 사적이란 인상도 준다.
김감독은 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하고 싶은 얘기를 해보자는 생각에서 이 소재를 택했다』면서 『사실 대중보다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세대를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답한다.
『시간은…』의 제작에는 김감독의 가족과 동료들이 갹출한 4억원이 들어갔다.촬영은 러시아 현지에서 이루어졌으며 스태프도 모두 러시아인으로 구성됐다.9월중순에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했다가 10월께 개봉될 예정.
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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