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정월 대보름의 '개죽 서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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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내 나이 열일곱,열여덟살에 있었던 일이다.휘황찬란한 보름달이 눈부신,1년중에 달이 제일 크게 보인다는 정월 대보름날 밤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일찍 먹고 삼삼오오 이웃집 언니네 건넌방에 모였다.대부분 나보다 한두살씩 더 많은 친구겸 언니들이고 내가 제일 나이가 적었던 것으로 기억된다.명절기분으로 들뜬 마음에 깔깔대며 웃고 윷놀이도 하는 사이에 밤이 제법 깊 었다.우리는뱃속이 제법 출출함을 느꼈고 누군가의 제의로 서리하기로 뜻을 모았다.그 당시엔 서리가 더러 있었던 시절이었다.남자들은 수박.참외에 복숭아.고구마,심지어 닭서리까지 서슴지 않았다.여자들이야 동치미국 정도 퍼다먹는게 고작이 었다.
우리는 행동대원을 뽑았다.여럿이 가봐야 들킬 부담만 더 크고해서 언니 둘과 나까지 셋이서 가기로 했다.어느 집 앞에서 나는 망을 보고 언니들은 사립문을 소리안나게 살그머니 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후 제법 큰 뭔가를 들고 나왔 고 나는 뭐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조마조마하며 뒤따라 돌아왔다.
와서보니 가마솥이었고 솥뚜껑을 열 때의 구수한 냄새가 기가 막혔다.우리는 다투어 퍼먹기 시작했다.쌀과 보리를 넣고 시래기도 적당히 넣고 멸칫가루로 맛을 내서인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음식 보다도 맛이 있었다.다른 언니들도 맛있어하며 연거푸 죽사발을 비웠다.죽솥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고 우리 모두는 아쉬운 입술을 하았다.죽솥을 적당한 곳에 감춰두고 우리는 각자 집으로흩어졌다.
다음날 이른 아침 동네를 쩌렁쩌렁 울리는 그댁 할머니의 고함을 듣고 나는 아연실색했다.
「어느 염치없는 인간들이 새끼 난 개 주려고 죽 한솥 쑤어놓았더니 솥까지 빼 가버렸냐,망할것들 같으니」.아뿔싸,그럼 어젯밤 그 맛있던 식사(?)가 개죽이었단 말인가.
오영은 서울마포구성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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