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정권 때 청와대 비서관·행정관 수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들과의 친분을 활용, 특정 업체에 건설 공사를 하청받게 하고 9억여원을 챙긴 중소기업 대표가 25일 경찰에 구속됐다.

경찰은 전직 청와대 비서관과 행정관이 개입했다는 진술과 정황을 확보하고 이들에 대해서도 수사 중이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이날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을 통해 대형 공사를 하청받게 한 대가로 총 9억1000만원을 챙긴 혐의(횡령·뇌물공여)로 서모(55)씨를 구속했다고 밝혔다. 또 서씨의 청탁으로 기업에 외압을 행사한 혐의(직권 남용 등)로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정상문(62)씨와 행정관(3급) 홍경태(53)씨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이날 이들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했다.

강남서 이지춘 수사과장은 “소환에 계속 불응할 경우 체포 영장을 신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청탁을 받아 공사를 불법 하청하거나 수주한 혐의(업무방해 등)로 H공사, D건설, S건설의 전·현직 사장·상무 등 4명도 입건됐다.

◇노 정권 실세와의 인연 활용=경찰에 따르면 서씨는 1996년 생수회사 ‘장수천’에 16억원 상당의 자동화 설비를 납품했다. 이 회사는 노 전 대통령이 한때 투자했던 회사다. 대금 중 5억원을 받지 못한 서씨는 당시 대표인 홍씨에게서 ‘현금 보관증’을 받았다. 보관증에 기재된 연대 보증인의 명의는 ‘노무현’이었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 조사에서 서씨는 “홍씨나 노 전 대통령과는 호형호제하던 사이”라고 진술했다. 2003년 2월 노 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홍씨와 정씨는 청와대에 들어갔다.

경찰에 따르면 2005년 10월 서씨는 골프 여행을 통해 알게 된 A건설 임원을 찾았다. 서씨는 96년에 받았던 현금 보관증을 보여주며 정권 실세들과의 친분을 과시했고, 청와대 행정관인 홍씨와 함께 서울 광화문 근처 한식당에서 A건설 사장을 만났다는게 경찰의 설명이다.

경찰이 서씨에 대해 신청한 구속영장에 따르면 홍씨는 당시 ‘서씨를 좀 많이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 대통령 명의의 보관증과 홍씨와의 친분에 A건설은 서씨를 ‘막강한 실세’로 믿었다는 것이다.

서씨는 곧 A건설에 “D건설에서 발주하는 부산 신항 컨테이너 부두공단 공사를 하청받자”고 제안했다. 영장에 따르면 홍씨는 ‘연결시켜달라’는 부탁을 받고 서씨에게 ‘D건설 사장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D건설의 하청 계약에 입찰한 A건설은 최저가인 96억원을 제시, 낙찰받았다.

경찰 조사 결과 서씨를 만난 D건설 사장은 담당 임원을 불러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임원은 경쟁 업체들의 입찰가를 미리 보여줘 낙찰을 도왔다고 한다. 경찰에 따르면 서씨는 2006년 7월과 9월에도 H공사에서 발주한 군산~장항 호안공사와 영덕~오산 도로공사를 각각 S건설과 D건설이 수주하도록 알선한 혐의도 받고 있다. 역시 공사 일부를 A건설에 하청한다는 조건이다. 그러나 2건의 공사는 실제 재하청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서씨가 H공사 사장실을 방문했을 때 ‘(정상문) 비서관님에게 뭐라고 했기에 입장 곤란하게 하냐, 야단 맞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서씨가 장수천의 미수금 5억원을 탕감하는 조건으로 공사 수주를 정씨와 홍씨에게 청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서씨는 “2007년 상반기쯤 홍씨로부터 ‘왜 현금보관증을 갖고 있느냐. 큰일 난다’는 말을 듣고 되돌려줬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서씨가 A건설로부터 9억여원을 받으며 ‘측근에 대한 사례비’라고 밝혔다는 점에 주목, 정씨와 홍씨에게 금품이 전달됐는지를 확인 중이다.

이진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