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地圖>문학 16."한국문학"의 문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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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73년3월17일 오후 숙명여대 강당.전국의 문인 6백30명이모여 한국문인협회 제12차 속개 총회를 열었다.그전 1월27일열린 정기총회에서 문협이사장 선거를 치렀으나 김동리(金東里).
조연현(趙演鉉)두 후보 모두 과반수를 못얻어 이날 재선거를 치렀다. 젊은 문인층의 지지를 업고 나선 趙후보측은 『문협을 혁신하기 위해서는 이사장을 2년간 연임한 金후보가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에 맞서 金후보측은 『「현대문학」「시문학」주간,펜클럽부위원장을 맡으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趙씨가「월간문학」편집권을 갖는 이사장까지 겸하면 1인천하 문단이 된다』고 저지했다.
개표 결과 趙씨 3백44표,金씨 2백83표로 예상을 뒤엎고 趙씨가 압승했다.그전 총회에서는 金씨가 3백21표로 趙씨를 9표 앞섰었다.유신아래 이렇다할 나라선거가 없을 때 이상과열된 문인들의 선거는 이러쿵 저러쿵 구설에 오르며 국민 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아울러 파당을 지어 감투싸움하는 문단의 치부를세상에 드러내게 됐다.
패배 직후 문협과 기관지 『월간문학』 편집실에서 짐을 싼 金씨는 『趙씨의 독주를 막겠다』며 청진동 해장국 골목 세진빌딩에조그마한 사무실을 마련하고 문예지 창간 작업에 들어갔다.『월간문학』편집자로 있던 「수제자」인 작가 이문구(李 文求)씨와 함께.이렇게 해서 73년11월호로 「민족문학 수립」과 「팽창한 문단인구의 기회균점」을 내건 『한국문학』(이하 『한문』)이 창간된다. 작가 이청준(李淸俊)씨가 제안한 「한국문학」이란 제호를 잡지협회에 등록하려하니 협회측은 일단 난색을 표했다.『일개인이 창간,한국문학 전체의 대표지도 아니면서 제호가 너무 거창하지 않느냐』는 협회를 한국문학의 모든 경향을 망라하겠다 며 설득시켰다.이 말대로 『한문』은 기존의 모든 유파를 오직 문학성만으로 고루 엮어갔다.이러한 편집방침은 창간호에 문학과지성 계열의 홍성원(洪盛原).김현,참여문학계열의 이호철(李浩哲).천승세(千勝世).임헌영(任軒永),순수문학계열의 신석정(辛夕汀).
이문희(李文熙)씨 등의 작품을 실은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전통의 순수문예지 『현대문학』과 당시 신생 문예지로서 참신한기획으로 대중 독자를 끌어들이던 『문학사상』 사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한문』은 신예작가들에게 과감하게 지면을 주었다.당시 등단 몇년 남짓인 황석영(黃晳暎).조 해일(趙海一).김주영(金周榮).조선작(趙善作)씨 등이 『한문』에 작품을 발표하며 주요 작가군으로 떠올랐다.
해장국과 빈대떡 집이 즐비한 청진동 『한문』의 사무실은 특히당시 반정부 문인들의 「소굴」이었다.이호철.고은(高銀).신경림(申庚林).황석영씨 등이 드나들며 74년11월18일 「문학인 1백1인의 선언문」을 기초해 참여문학단체인 자유 실천문인협의회를 태동시킨 곳이 바로 10평 남짓의 이 사무실이다.친정부 문인의 거목 金씨의 「안전한」 그늘에서 반정부 문학단체가 탄생한것이다.이 일을 기화로 이문구씨는 75년10월 『한문』편집장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김동리의 부인인 작가 손소희(孫素熙)씨가 계탄 돈 3백만원으로 시작된 『한문』은 경영난에 허덕이다 76년 시인 이근배(李根培)씨의 손으로 넘어간다.李씨는 신인의 과감한 발굴을 위해 당시로는 파격적인 1백만원고료 신인상을 신설했다.
또 단편 위주의 소설을 장편화시키기 위해 매호 권두에 중편소설 2편씩을 실어 80년대 장편소설 시대를 맞게한다.
74년도부터 계절별 시행을 원칙으로 한 신인작품상과 76년부터 83년까지 매년말 1백만원고료 신인상의 두 등용문을 통해 『한문』은 총 1백19명의 신인을 문단에 내보냈다.
소설쪽에서는 74년 3월호에서 김태영(金泰永)씨를 단편『산놀이』로 내보낸 것을 시작으로 6월호에서는 문순태(文淳太)씨를 단편 『백제의 미소』로 등단시켰다.文씨는 이후 한(恨)의 미학의 극치를 보인 「징소리」연작을 비롯,장편『타오르 는 강』등을발표하며 주요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이후 신인상을 통해 나온 작가들로는 유순하(柳舜夏).송우혜(宋友惠).정찬주(鄭燦周).강난경(姜蘭經).이유범(李庾範).김지수.정혜영씨 등이 있다.
한편 1백만원고료 신인상을 통해서는 77년 김원우씨가 소설『임지』로 화려하게 데뷔했으며 이듬해에는 김성동(金聖東)씨가 『만다라』로 장안의 화제를 모으며 등단했다.대산문학상 수상작가 이승우(李承雨)씨도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이 상 을 통해 등단했다.1백만원고료 신인상은 이근배씨가 역시 경영난에 허덕이다『한문』을 작가 조정래(趙廷來)씨에게 넘긴 84년 폐지됐다.
한편 시 쪽에서는 공주대 교수로 충청권 시단을 일구고 있던 조재훈(趙載勳)씨와 오월시동인으로 80년대 민중시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김진경씨가 74년 등단했다.이후 역시 5월시동인인 이영진씨도 76년 『한문』의 신인상을 통해 나왔다 .민중시와는반대적 입장에서 시의 미학과 순수성을 고집하던 시운동 동인으로활동했던 하재봉(河在鳳).안재찬 시인도 80년 『한문』을 통해나란히 나왔다.安씨는 현재 류시화란 필명의 베스트셀러 시인으로활약하고 있다.이밖에 김수복(金 秀福).김강태.차옥혜(車玉惠).서지월(徐芝月).허혜정씨 등 총 62명의 시인이 『한문』을 통해 나왔다.
평론 부문에서는 78년 이명재(李明宰)씨가 등단한 이래 박덕규(朴德奎).정효구(鄭孝九).이숭원(李崇源)씨 등 7명이 나왔다. 『한문』은 89년 경영자 출신 작가 홍상화씨에게 넘어갔다.적지 않은 재력으로 문예지를 통해 한국문학에 이바지하겠다는 의욕으로 재출발한 『한문』은 그러나 90년대 문예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창간돼 문예지 운영 환경이 악화되자 월간에서 격월간을 거쳐 94년 겨울호부터 계간체제로 내려오고 있다.
20여년간 월간으로서 한국문학의 공론지 역할을 하려 노력했던『한문』의 지면이 3분의1로 줄어들고 영향력 또한 약화된데 많은 문인들은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그러면서도 뚜렷한 목소리로각자의 경향을 대표하면서도 그 울안에 갇힌 기 존의 계간지 틈에서 진정한 문학 「공론지」로 거듭 태어나길 바라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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