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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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포도같은 시어 … 씹다보면 달콤

“이 시를 썼을 때 분위기가 생생하게 기억나요. 집에서 어머니는 드라마를 보고 계셨고요, 음···. 저는 옆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시를 쓰고 있었어요. 말 그대로 오늘 나는, 그 하루의 느낌이죠.”

특별할 게 없었던 하루. 이렇듯 사소한 일상은 닥쳐오면서 곧 잊혀진다. 사라진 시간들 뒤에 따라오는 오늘, 화자는 ‘지난 시절’과 ‘죽은 친구들’과 ‘작년의 번민’을 모두 잊었다. 대신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그 미래의 모습은 아직 모르는 ‘욕망’이기도 하고 ‘무(無)’의 상태이기도 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오늘’이다.

“지난 시간을 모두 기억한다고 내가 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망각함으로써 내가 되는 거죠.”

모든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짐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기억의 곳간을 채우고 비우며 끊임없이 ‘자아’를 만들어가는 데 무심하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으로 너무나 쉽게 ‘나’를 정의 내린다. 그를 “꽤나 진지한 태도의 시인”으로 오해하고 “한국에서 온 좌파 급진주의자”로(‘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명상’) 생각해 버린다. 시인은 그런 시선이 “너무 불편하다”고 말한다. “타인이 보는 나 이외에 잉여의 부분, 규정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실은 그게 정말 거대한 부분이거든요.” 그 거대한 부분을 감각적으로 생생히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시’가 된다.

타인을 ‘어떤 사람’으로 쉽게 규정지으면서도 나는 규정 당하고 싶지 않은 욕망은 창과 방패처럼 끊임없이 부딪힌다. 결국 누구든 “불안과 권태를 숙명처럼 지고 사는 유한한 존재”일 뿐인데도. 이 비극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시인의 답이 덤덤하다. 사랑이 불안한 실존을 극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함으로써 살아가고 살아내잖아요.”

‘살아낸다’고 했다. 내가 아닌 타자를 끌어안고 욕망함으로써 살아낸다고. 시인에게 사랑은 흡사 종교와 같다.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지만 고대종교처럼 찾아온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에 그 생은 장대하고 거룩한,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가 될 수 있다.(‘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 위에서 연꽃처럼 피었던 남자의 손은 이별하는 순간 평범해진다. ‘마치 환속한 중의 이마가 빛을 잃어가듯이.’(‘평범해지는 손’)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시어는 무뚝뚝하다. 이를 두고 “태생적으로 건조하다. 그런데 굉장히 흡입력이 강하다. 상당히 폭발적인 가능성이 있는 시인”이라고 문태준 예심위원은 평했다.

시의 마무리가 재미있다. 초등학생의 일기처럼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을 때’가 청춘이라 속삭였던 시인에게는 오늘이 늘 청춘이다.(‘청춘’) 완전히 무너지고 싶은 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다. 건포도 같이 마르고 건조한 언어들을 천천히 씹다 보면, 달짝지근함이 온몸에 퍼지면서 그 말이 탐난다.

글=임주리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기발한 유머로 진지함을 포장

 상상력·지식·유머. 박형서는 이 삼박자를 골고루 갖춘 작가다. 그는 일찍이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와 같이 제목만으로도 발칙한 단편을 써 상당수의 독자를 확보했다. 이번엔 ‘금도끼 은도끼’ 설화를 과학적으로 고증하는 연구팀의 이야기다. 산신령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도끼로 나무를 찍는 소리가 60dB(데시벨)에 달해야한다는 결과를 계산하고 이를 실험에 적용시키는 과정 등 디테일이 너무나 상세하다. 마치 그런 학문이 진짜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태국에 머물고 있는 작가에게 e-메일로 물었다. 혹시 어릴 때 과학자가 되고 싶었느냐고.

“수학과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국문학과에 입학한 이후입니다. 그 전에는 수열, 주기율표 따위의 말만 들어도 혼절할 만큼 그쪽과 등을 지던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의 교육이란 왜 학생으로 하여금 이렇게 재미있는 학문을 증오하게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이라고 다를까. ‘나’는 계룡산 선화무당을 연구하던 T교수의 지시대로 날선 작두 위에서 뛰다 인대가 끊어졌다. 그럼에도 “세상은 보통 사람과 절뚝발이로 나뉘지 않는다. 세상은 오직 전임과 비전임으로 나뉜다”고 독백한다. ‘나’에게 교수 자리는 ‘진리 추구’란 학문 본연의 의미에 앞서는 가치다. A학점을 장담하는 T교수 앞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도끼질에 나서는 학부생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학문적 열정은 “개새끼”를 입에 달고 다니며 연구원과 학생들 위에 군림하는 T교수가 제일 앞선다.

애초 ‘신장 157.2cm에 68㎏의 체중을 지닌 전형적인 농경사회형 고도비만’이던 산신령은 더 많은 데이터를 원하는 T교수의 욕심대로 실험이 반복되자 3m가 넘을 만큼 거대해진다. 산신령이 일으킨 분노의 폭풍으로 모두가 전멸될 위기. T교수는 플라스마 배터리를 들고 산신령에게 돌주한다. 음전하로 이뤄진 산신령은 사라지고, T교수는 검게 탄 시신으로 남는다. 작가는 이를 “악역이었던 T교수가 자신으로 인해 탄생한 훨씬 강력한 악을 파괴하기 위해 감행한 자폭테러”라고 설명한다. 큭큭 거리며 읽게 되는 소설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는 비장미가 흐른다. T교수도 죽고, 실험 결과를 증명할 모든 데이터는 파괴된다. 금도끼·은도끼·무쇠도끼 다 뺏긴 셈이다.

“저는 오랫동안 삶의 불가해성, 특히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타인 혹은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고민해 왔습니다. 지식이 축적되고 과학이 발달하면 우리는 결국 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까요?”

답은 나와 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것. 작가는 “더 나쁜 건, 그리고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은 자기가 행한 노력에 도취돼 스스로 어느 선에 도달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묵직한 주제의식이다. 그러나 “십여 년 갈고 닦은 ‘도마 위에서 꼬챙이로 머리를 막 관통당한 젊은 붕장어’의 표정 연기가 가장 자신있다”는 작가의 유머감각 덕에 소설은 의미와 재미를 겸비했다.

글=이경희 기자, 사진=박형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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