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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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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로 시작돼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로 끝나는 '공산당 선언'은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작성했다. 소문을 타고 번지는 유령 같은 공산주의 이념에 유럽의 구체제는 두려움을 느꼈다. 공산주의는 노동자계급이 폭력혁명으로 자본가 권력을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이념에 실체를 부여하려 했다. 관념의 유령에서 벗어나 실체적인 당(黨)조직을 건설하자고 선언한 것이다. 그 공산주의는 소련의 붕괴로 150년 만에 파산했다. 미국과의 체제경쟁에서 패배했다. 대신 사회주의의 이상을 민주주의를 통해 실현하겠다는 이른바 '민주적 사회주의'의 실험들이 이어져 왔다.

민주노동당은 민주적 사회주의 정당의 한국 버전이다. 당원은 5만4000명. 국내 좌파는 지금껏 실체보다 이념으로 존재했다. 두려움이나 신념 같은 형태였다. 그래서 떠돌이 유령 같다는 느낌도 있었다.

그들이 국회에 진입했다. 선거민심이 민주노동당의 실체를 받아들였다. 언제나 그렇듯 실체에 눈감은 두려움이나 실체를 부풀리는 과잉관념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예컨대 민주노동당에 관한 악의에 찬 오해에선 벗어나는 게 좋다. 그들이 친 김정일 정당이며 북한 노동당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오해다.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역할모델을 독일의 사회민주당에서 찾고 있다. 그들은 김정일 정권의 가부장적.반인권적 통치방식에 비판적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내부엔 관념이 너무 강해 실체읽기에 실패한 듯한 부분이 있다. 그들의 강령 중 일부가 그렇다. '미국을 정점으로 한 외세는 한반도를 분할하고, (민중의)민주와 자유를 빼앗아 갔다' '한국의 정치권력은 국내외 자본의 충실한 대리자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와 민중주체의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민중을 억압하는 모든 국가기구의 법과 제도를 폐지할 것이다' 등의 내용이다. 국가를 자본가계급의 민중수탈 기구로 보는 측면이 강하다. 자체 성장동력을 쉼없이 개발하지 않으면 치열한 국가경쟁에서 도태되고, 국민의 배를 곯게 만드는 '비즈니스 국가'시대에 우리가 처해 있다는 현실인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강령은 집권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