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지역에 볼모된 국회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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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번 4.11총선은 그 정치내용면에서는 한없이 초라하고 왜소화(矮小化)한 선거였다.이번 총선처럼 정치적 쟁점이 부각 안됐던 선거도 일찍이 없었다.지역주의와 비방만은 어느 선거 못지 않았지만 선거쟁점만을 놓고 보자면 시.군.구의원선 거와도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우리 1인당 국민소득은 이제 겨우 1만달러 수준인데도 소비성향은 3만~4만달러 소득의 선진국과 맞먹는다고 한다.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흉내내기요 웃자란 현상이다.
정치도 그것을 닮아 가는 것일까.줄곧 권위주의정치 속에서 헤매다 이제 겨우 문민시대에 들어섰는데 벌써 선진국 흉내를 내는것인지 유권자들부터가 정치적 쟁점들에는 신물을 내고 소소한 지역개발 약속에나 귀를 기울이고 있다.
주위 사정을 살펴보자면 총선에서조차 도로포장이나 버스노선문제를 논하고 있어도 좋을 만큼 여유 있고 한가한 처지는 아니다.
남북문제만 해도 당장 얼마나 첨예한 상태인가.동북아 전체정세도얼마나 냉엄한가.양극화(兩極化)문제 등 내부 갈 등 또한 한두가지인가.그런데도 이번 총선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전혀 쟁점이 되지 않았으니 우리사회의 정치적 관심과 행태 또한 분수에 맞지않게 웃자랐다 할 수밖에 없다.뛰어난 의정활동을 보여 스타라는말까지 들어 온 의원들이 이번 선거에서 뜻밖에 줄줄이 낙선한 것도 그런 분위기가 빚어 낸 불상사다.낙선의원들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패인(敗因)은 의정활동에 치중하느라 지역구관리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점이라고 한다.
지역의 문제점과 지역주민의 의사를 파악해 그것을 중앙정치를 통해 해결하거나 대변하는 것은 지역구의원의 기본적인 책무중 하나다.지역구 관리소홀이 그러한 책무의 소홀을 뜻한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구관리라는 것이 실제로는 어떤 내용인가.주로 지역구민의 경조사에 인사하고,취직이나 이권청탁을 들어주고 님비현상에 앞장서고 예산 따 오고 하는 등의 일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실제 선거전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건 그런 형태의 지역구관리였다.신인들이『중앙정치에만 신경썼지 지역구를 위해 해놓은 게 없지 않으냐』고 윽박지르자 언론이나 시민단체로부터 의정활동을 높이 평가받았던 의원도,내심 더 높은 목표를 품고 있던 관록의 의원도 힘 없이 나가 떨어졌다.
신인들의 대거 등장을 반기면서도 왠지 꺼림칙한 것은 그들의 주무기가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우리가 신인의 등장을 반기는 이유가 그들이 과거 어느 의원보다 경조사에 자주 참석하고 골목길 포장에 열성적일 것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그 러나 마당발작전으로 승리한 신인들은 자칫하면 오히려 우리 정치를 더욱더 초라하고 왜소하게 만들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런 점에서 유권자들은 의정활동이 뛰어났던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낙선한 데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우리들은 정치인들의 부패나 부도덕을 비난하면서도 우리들 스스로 그들을 부정과부패 속으로 끌어 넣기도 한다.흔히 말하는 지역 구관리라는 것은 하나에서 열까지 돈드는 일이다.실제로 이번 선거만 봐도 마당발작전으로 국회진출에 성공한 신인들은 대개가 여당후보거나 선거자금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정치발전을 바란다면 지역구관리가 아니라 의정활동이 국회의원을가늠하는 제1의 잣대가 돼야 한다.의정활동은 평가 안해 주고 지역개발실적만 평가한다면 누가 남북문제를 논하고 경제정책을 다룰 것인가.지역개발은 지자체와 시.군.구의원에게 맡겨도 충분하다.국회의원과 지방의회의원간에는 역할분담이 있어야 한다.
의정활동이 뛰어난 의원이 지역구에서 실족(失足)하는 이번과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는 독일식으로 지역구 및 전국구 정당명부에 동시에 등록해 심판을 받는 제도의 도입도 검토해 볼 만하다.지역구에서 낙선하더라도 정당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라 여길때는 비례대표로 당선시키는 방법이다.
우리가 신인들의 등장을 반기는 것은 정치물갈이를 기대하기 때문인데 신인들일수록 지역구관리에 매달린다면 정치물갈이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일 것이다.마당발작전으로 당선된 신인일수록 지역구에서 풀어주자.그래야 정치가 바뀐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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