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춘시인 등단 29년만에 첫 시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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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시단에 나온 서정춘(徐廷春.55.
사진)씨가 30년 가까이 지나서야 첫시집 『죽편(竹篇)』을 최근 펴냈다(동학사).
실린 시는 겨우 34편으로 한 해에 한 편꼴로 썼다는 얘기다. 첫머리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徐씨는 『아 나의 농사는 참혹하구나 흑!흑!』하고 울어버렸다.
그러나 34편 모두 구슬을 꿴 듯한 주옥편들로 그의 시에 대한 엄결성을 읽게 한다.
『애인아/우리가 남 모르는 사랑의 죄를 짓고도/새빨간 거짓말로/아름답다 아름답다 노래할 수 있으랴/우리가 오래 전에/똑같은 공중에서 바람이거나/어느 들녘이며 야산 같은 데서도/똑같은물이고 흙이었을 때/우리 서로 옷 벗은 알몸으로 /입 맞추고 몸 부비는 애인 아니었겠느냐/우리가 죄로써 죽은 다음에도/다시물이며 공기며 흙이 될 수 없다면/우리 여기서부터 빨리빨리/중천으로 쏘아진 화살로 달아나자/태양에 가려진 눈부신 과녘이/허물없이 우리를 녹여버릴 테니』(『너 에게』전문).
즉흥적 연애에 즉흥적 연애시가 판치는 세상에 徐씨의 연시(戀詩)는 너무 절실해 차라리 슬프다.
그 사랑은 물.흙.공기 등 삼라만상의 몸체와 조응하며 우주적존재로 나아가고 또 이승.저승의 경계도 허문다.
그러면서 얼마나 우리네 사랑의 본질을 추억케 하고 있는가.
찔끔찔끔 설사하듯 시를 쏟아내 「시공해」가 우려되는 작금의 시단이기에 익어 터져 나온 말들 만을 알알이 꿴 徐씨의 시에 대한 외경이 유난히 돋보인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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