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팅中年>2.서양화가 안정숙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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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결혼한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마흔넘어 다시 시작한 그림으로 지난해 대한민국미술대전과 MBC미술대전에서 내리 특선을 따내는 등 뒤늦은 전성기를 맞고 있는 늦깎이 서양화가 안정숙(安貞淑.48)씨.그의 작은 반란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됐다.
『제 나이 마흔하나에 시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그 분의 헌신적인 50년 결혼생활에 남은 것이라곤 남편과 자식들의 덧없는 슬픔뿐인 것을 보고 새삼 충격을 받았습니다.』 스물둘에 결혼해 살림과 아이들이 전부였던 자신을 돌아봤다.지금이라도 하지 않으면 죽는 순간에 제일 후회스러울 일이 무엇일까도 생각했다.20년동안 가슴깊은 곳에 묻어둔 채 꺼내볼 염두조차 못냈던 그림이떠올랐다.『홍익대 동양화과 2 년때 가정형편으로 학교를 그만뒀거든요.8남매의 맏이로 더이상 등록금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시어머님이 돌아가신 89년 가을,미련만 남기고 떠났던 모교로 돌아와 부설 미술교육원에 등록했다.
가족들이 사는 부산에서 매주 한번씩 서울로 날아오는 생활을 2년쯤 지속할 무렵 아예 홍익대앞에 작업실을 마련,「두집 살림」을 선언했다.
『두 아이가 고등학교.초등학교 때였으니 집에선 난리가 났지요.하지만 앞만 보고 달리는 제 성격을 잘 아는 남편이 「죽을 때까지 붓을 놓겠다는 말은 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곡예사 줄타는 것같은 생활이 시작됐다.하지만 다시 찾은 나만의 세계는 두고온 가족을 잠시 잊게할 정도로매력적이었다.서울로 올라오기전 3학년에 편입학했던 부산방송대 불문과 공부도 기를 쓰고 계속했다.언젠가 파리 유학을 가 리라마음먹고 시작한 도전이었다.방송대 졸업장을 손에 쥐자마자 대학원 공부에 뛰어들었다.그러나 홍익대 대학원은 팔팔한 젊은 후배들도 서너번씩 실패하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교수님들이 전부 말리셨어요.애당초 되는 게임이 아니라고요.
』 92년 가을부터 두학기 내리 고배를 마셨다.그림 도구를 한보따리 싸가지고 가야하는 실기시험장,꼭 아들 나이만한 수험생들앞에서 『거기 아줌마는 나가세요』라는 수모를 당한 것도 낙방의절망감보다 나았다.
다 때려치우고 부산으로 내려갔다.다시는 붓을 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하지만 그의 등을 다시 떼민 것은 『당신 공부 뒷바라지 하느라 술.담배까지 끊은 게 겨우 이런 꼴을 보자는 것이었느냐』고 화를 낸 남편이었다.결국 세번만에 합격, 올봄 대학원을 졸업하고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들어간 安씨는 지난 6~7년간의 파이팅을 『화가라는 세속적인 이름에 연연했다면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고 회고한다.엄마와 아내라는 이름의 여자에게도 자기 세계를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하는 그는 『미국 유학도 떠날 생각』이라며 지칠줄 모르는 의욕을 보인다.
이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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