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살 길은 FTA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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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 다시 결렬됐다. 7년째 제자리걸음이다. 향후 전망도 불투명하다. 파스칼 라미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은 30일(한국시간) 스위스 제네바 WTO 사무국에서 153개 회원국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열린 무역협상위원회에서 협상이 결렬됐다고 선언했다.

라미 총장은 기자회견에서 “(협상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 재추진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DDA 협상은 향후 1~2년간 주요 국가의 정치 일정 때문에 진전이 없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도하개발어젠다(DDA)협상이 7년간의 대장정 끝에 결렬됐다. 왼쪽부터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수전 슈워브 미국 무역대표부(USTR)대표·카말 나스 인도 상업장관·파스칼 라미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등이 30일(한국시간) 스위스 제네바 WTO 사무국에서 기자들에게 협상 결렬에 대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제네바=연합뉴스]

◇왜 결렬됐나=이번 DDA 협상은 한때 최대 장애물이었던 농산물 분야에서 잠정 타협안을 내며 타결 기미를 보였다. 침체한 세계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협상 타결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작용했다.

그러나 특정 물품의 수입이 급증했을 때 임시로 관세율을 높이는 특별긴급관세(SSM) 발동 요건이 막판 걸림돌이 됐다. SSM은 개도국에만 해당되는 조항이다. 이 발동 요건으로 선진국들은 “과거 3년 평균보다 특정물품의 수입이 40% 이상 늘었을 때”를 내세웠지만 인도 등 개도국은 “10%만 늘어도 발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맞섰다.

또 미국은 “중국이 면화 관세를 낮추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 미국도 면화 보조금을 줄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중국은 “2001년 WTO에 가입하면서 관세를 대폭 낮췄는데 또 낮추는 것은 일방적으로 불리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산품의 수입 자유화 세부 원칙 논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협상 막판에 주요국이 대립한 배경에는 각국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깔려 있었다는 분석이다. 미국은 올해 말에 대선을, 인도는 내년에 총선을 앞두고 있어 보조금을 줄이고 시장을 개방하는 것과 같은 표를 깎는 결정을 할 리 없었다는 것이다. 통상교섭본부 안호영 통상교섭조정관은 “(결렬) 배경에는 정치적 상황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향후 전망은=회의 막바지에 각국은 책임을 상대방에 떠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카말 나스 인도 상업장관은 “미국의 요구는 불합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수전 슈워브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인도를 겨냥해 “식료품 값이 폭등하는데 각국이 식량 수입 장벽을 얼마나 두껍게, 빨리 쌓을지 논쟁한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서로 얼굴을 붉히는 상황에서 당장 재협상을 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각국의 정치 일정이 겹쳐 DDA 논의는 미뤄질 수밖에 없다. 미국과 인도는 각각 대선과 총선을 치러야 하고, 유럽연합도 내년에 집행부를 교체한다. 내년 8월 말에는 협상 타결을 강력히 밀어붙였던 라미 총장의 임기가 끝난다. 이런 이유로 1~2년 내 협상 타결이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일부에서는 “DDA는 물 건너갔다”는 얘기도 나온다. 다자간 협상보다는 양자간 협상인 자유무역협정(FTA)을 맺는 국가가 늘어나면서 DDA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도 한 이유다.

권혁주 기자



한국의 득실은 … 한국 농업 시간 벌었지만 공산품 수출 길은 막혔다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 결렬되면서 한국 농업은 1~2년 시간을 벌게 됐다. 그러나 크게 보면 협상 결렬은 기뻐할 일이 아니다.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무역투자실장은 “잠정 타협안대로 타결됐다면 공산품 수출이 확대되고 국내 농업 보호도 상당 수준까지 할 수 있었다”며 “협상 결렬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평가했다.

한국이 개발도상국 지위를 유지한다는 전제 아래 타협안대로 협정이 체결됐다면 쌀·마늘·고추 등 10개 안팎의 농산물 관세를 내리지 않아도 됐다. 주요 품목은 보호되는 셈이다. 또 선진국으로 분류되더라도 최소한의 안전 장치는 마련할 수 있었다. 최원목 이화여대 교수는 “농산물 개방 확대를 영원히 비켜갈 순 없기 때문에 한꺼번에 여는 것보다 DDA를 통해 단계적으로 관세를 감축하는 게 충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쌀이 문제다. DDA 타결이 늦어지면서 일본 등 쌀 수입국의 시장 개방 폭은 2004년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우리는 2004년 수입 자유화(관세화)를 하지 않는 대신 소비량의 최대 8%를 의무 수입하기로 했다. 의무 수입량은 매년 늘어난다. DDA가 타결됐다면 득실을 따져 개방 방식을 바꿀 수 있었는데, 협상 결렬로 속절없이 의무 수입만 늘리게 된 것이다.

공산품 수출 기회도 줄었다. 서진교 실장은 “DDA로 공산품 수출이 늘어나면 국내총생산(GDP)이 0.45%포인트 증가하는 효과가 나타났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당분간 다자간 무역 협상이 어려워져 양자 간 무역협상, 즉 자유무역협정(FTA)의 중요성이 더 커지게 됐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는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가 살 길은 FTA뿐”이라며 “한·미 FTA 비준을 서두르고 다른 국가와 FTA를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호영 통상교섭본부 통상교섭조정관은 “지역 협력과 양자 간 협력 노력을 계속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지금과 같은 일괄타결 방식이 힘들다면 합의가능한 분야별 타결방식도 한 대안이 될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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