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⑧ 中 최후의 고전 시인 천싼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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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야오자(姚家) 후퉁(胡同ㆍ골목)에 있는 자택 서재에서 독서 중인 만년의 천싼리. 김명호 제공

1936년 국제 펜클럽 회의가 런던에서 열렸다. 신문학과 구문학을 대표하는 후스(胡適)와 천싼리(陳三立)가 초청을 받았다. 천은 참석하지 않았다. 자신이 중국을 대표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인도 시인 타고르가 방문해 시집을 선물했을 때도 어쩔 줄 몰라 했다. “타고르는 인도를 대표하는 시인인데 나는 중국을 대표하는 시인이 아니다.”

천은 젊은 시절 부친의 개혁운동을 보좌하다가 관직에서 추방당한 후 시작(詩作)과 교육에만 전념했다. 그의 교육은 전통을 고집하지 않았다. 사서오경 외에 수학ㆍ영어ㆍ음악ㆍ회화를 중요시했다. 중국의 고전을 섭렵한 뒤에 서구의 지식을 수용케 했다. 자손들에게는 과거에 응시해 지식을 가지고 공명을 다투는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의 아들 인커(寅恪)는 소년 시절 고전의 세계에 빠져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구학의 기초가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어 서구 여러 나라에 유학을 했어도 근본이 동요되거나 전통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지 않았다. 서양학문을 일찍 접촉했지만 배척은 물론 숭배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상 속에 동서문화의 충돌이 있을 수 없었고 오랜 유학생활을 했음에도 서구화된 적이 없었다.

천싼리는 세상소식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루산(廬山)에서 요양하던 중에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자 상하이에서 비행기가 올 때마다 전황을 캐묻고 수심에 잠겼다. 꿈속에서 일본인들을 미친 듯이 질타하는 바람에 온 가족이 깨어나곤 했다.

33년 천은 베이핑(北平ㆍ베이징)에 거처를 정했다. 틈만 나면 자손들을 데리고 열강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폐허들을 둘러보았다. 국치(國恥)라며 통탄했다. 37년 7월 시국은 급전직하, 중ㆍ일 양국 간에 전운이 감돌았다. “나라가 환란에 처했다. 절대로 떠날 수 없다”며 피란 가지 않았다. 톈진과 베이핑을 점령한 일본 군부가 그를 모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응하지 않았다. 첩자(偵探)들이 문 앞에서 서성대자 청소부들을 불러 쫓아버렸다. 복용하던 약과 곡기를 끊고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85세였다. 그는 ‘청말사공자(淸末四公子)’ 중의 한 사람이며 중국 최후의 고전 시인이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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