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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江湖동양학] 주역의 대가 야산(也山) 이달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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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뒤의 상황에 대한 예측 결과가 곧바로 돈으로 환산되는 곳. 그곳이 바로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일컬어지는 주식시장이다. 주식시장에는 예측의 도사들이 운집하게 마련이다. 현재 한국 증시에도 내로라 하는 육효점(六爻占)의 고수들이 활약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언제 주가지수 950을 돌파할 것인가?'하는 물음을 가지고 육효를 뽑는다. 뽑힌 육효를 보면 950을 돌파하는 시점, 즉 연.월.일이 나온다. 물론 이는 얼마나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뽑느냐에 따라 결과는 정확하게 나올 수도 있고, 엉터리로 나올 수도 있다. 제대로 육효를 뽑아 돈을 벌면 고수이고, 돈을 벌지 못하면 하수임이 분명하게 판가름난다. 진정한 고수는 따따부따가 아니라 실전을 통해 자신의 내공을 입증하는 법이다.

주역의 대가였던 야산도 1920년대 중반부터 대구의 '미두장'(米豆場)에서 자신의 내공을 입증하였다. 일제 때 전국의 대도시에는 미두장이 있었다. 미두란 '미곡(米穀)'과 '대두(大豆)'를 이른다. 한.일병합 이후 조선에서 일본으로 미곡과 대두 수출이 급증하자 미두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미두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중개인을 통해 보증금으로 쌀 100석을 예치하고 미두 통장을 받았다고 한다. 미두 통장이 있는 사람은 보증금만 가지고도 몇천, 몇만석을 외상으로 살 수 있었다. 결제하기 전이라도 가격이 떨어졌을 때 대량 매입하였다가, 가격이 올랐을 때 팔면 떼돈을 버는 거래 방식이었던 것이다. 요즘 주식시장의 선물거래와 흡사한 시스템이었다.

야산은 그의 나이 36세였던 24년 봄 대구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양지바른 곳에 번듯한 집을 지어놓고 사는 반면 조선 사람들은 음지에서 빈민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목도한다. 의협심이 강했던 그는 그 참상을 목격하면서 '내가 조선 사람들을 잘살게 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겠다. 야산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돈을 버는 방법은 미두였다.

대구 미두장에 야산이 데뷔하면서 세운 목표액은 3600만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화폐 가치로 10원이면 소 한 마리 값이었고, 논 한 마지기 값이기도 하였으니, 3600만원은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는 신안(神眼)이 열려 있었으므로 미두 시세가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손바닥 보듯이 훤하게 내다보았다. 투자하는 대로 떼돈을 거머쥐었음은 물론이다. 대구의 미두꾼들 사이에서 야산은 '옥관도사'(玉冠道士)로 불렸다. 옥으로 만든 관을 쓴 도사. 즉 '옥황상제'라는 뜻이다. 옥관도사가 미두장에 출현할 때마다 주변의 미두꾼들은 과연 그가 어떤 종목을 선택하는지 주시하곤 하였다. 야산 뒤만 따라가면 탄탄대로였다.

야산은 평소 대구 근교의 암자에 머무르다가 한달에 한두번 미두장에 출현하곤 하였는데, 미두계의 황제로 대접받았다. 제자들과 후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그가 35년까지 근 10년 동안 미두장에서 번 돈은 2900만원 정도 되었다고 한다. 야산이 떼돈을 벌었다는 소문을 듣고 하루는 그의 장남인 진화(震和:1908 ~ 77)가 찾아왔다. 그가 "아버지 돈 많이 벌었다는데 저도 용돈 좀 주세요"라고 청하자 야산은 "이놈아! 이 돈이 내 돈인 줄 아느냐? 이 돈은 조선 백성의 돈이다" 하면서 아들 귀뺨을 올려붙였단다. 옆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제자들이 딱하게 여긴 나머지 돈을 거둬 진화에게 주었는데, 그 금액이 150원이었다고 전한다.

야산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미두에서 번 돈을 사적인 용도로는 일절 쓰지 않았다. 대부분을 만주에 독립자금으로 보냈다. 그때 만주로 자금을 전달했던 사람이 엄주동(嚴柱東:1897 ~ 1974)과 이상춘(李相春)이었다. 충북 진천 출신인 엄주동은 후에 대종교 나철(羅喆)의 의발(衣鉢)을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엄주동은 29년 이후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는 일을 하다가 우연히 미두장에서 야산과 만나게 되었고, 야산이 주는 돈을 만주에 전달하는 주요한 자금 전달책이 되었다.

나머지 돈은 광산(鑛山)을 개발하는 데 투자되었다. 야산은 전국 15군데 광산에다 돈을 투자하였다. 어디에 금이 묻혀 있는가를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야산은 금광에서 얻은 수입으로 강원도 철원에 조선인 수십가구를 이주시켜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그는 일본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급자족의 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실전 주역의 고수답게 미두장에서 엄청난 돈을 벌었던 야산. 그는 그 돈으로 차를 바꾸지도 않았고, 집을 바꾸지도 않았고, 가족을 위해 쓰지도 않았다. 오로지 민족을 위해 돈을 썼다. 그 것이 요즘의 주식꾼들과 다른 것이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江湖東洋學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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