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왜곡은 고래심줄같은 몰염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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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5월 타계한『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사진) 선생의 유고(遺稿) ‘일본산고(日本散考)’가 18일 공개됐다. 고인의 외동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은 “유품을 정리하다 흩어져있던 미발표 육필 원고를 찾았다”며 “최근 독도문제가 불거져 공개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일본산고’는 일제강점기 시절 고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일간의 원한, 일본의 신민사관 등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산문이다. ‘증오의 근원’ ‘신국의 허상’ ‘동경 까마귀’ 등 총 세 편으로 원고지 63장 분량. 이중 제 3편 ‘동경 까마귀’는 미완성 원고다. 집필 시점은 15~20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오늘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날조된 역사교과서는 여전히 피해 받은 국가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있고 고래심줄같은 몰염치는 그것을 시정하지 않은 채 뻗치고 있는 것이다”란 글구는 20년 세월을 무색케 한다.

선생은 ‘증오의 근원’에서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며 “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 잔인무도한 그들 행적으로 보며 한반도에서 추방된 흉악한 죄인들이 그들 조상인가보다 하고 뇌까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고인은 “서로 이해하게 되면 좋고, 다만 인류라는 자각으로 나를 다스려가며 앞으로 이글을 써 나갈 생각이다”라며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내보인다.

‘신국의 허상’에선 “신화란 어느 곳에서든 세월 따라서 삭제되고 날조하고 표절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며 신화를 기틀로 삼아 나라에 정통성을 부여하려 한 일본의 역사관을 다룬다. 선생은 “높아져가고 있는 우익의 고함은 우리의 근심이며 공포(…)일본의 장래를 위해서도 비극”이라고 지적한다.

‘동경 까마귀’에선 “조국을 잃었다는 것은 고아가 된 것과 다를 게 없다”며 나라 잃은 우리 민족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들의 표정이었다. 증오와 원한이 없었다.(…)바로 그런 것 때문에 나라를 빼앗겼을 것이며 또 바로 그런 낙천적 해학이 갖는 여유 때문에 끝내는 회생하여 이 민족이 망하지 않고 긴 세월 존속돼 온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일본 징용을 다녀온 일꾼들의 모습을 보며 적은 이 문장에서 ‘일본산고’는 멈췄다. 김 관장은 “일제강점기를 겪은 어머님은 일본에 대해 젊은 세대가 모르는 걸 적어 한 권의 책으로 남기려 하셨다”며 “밑바닥의 분노를 가라앉히며 공정하게 글을 쓰시려다 보니 집필이 쉽지 않았던 듯하다”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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