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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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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90년대 중반 스웨덴의 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인류 역사상 300만~500만명이 살상된 전쟁이 36개나 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물론 여기에는 1000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난 제1, 2차 세계대전은 제외돼 있다. 20세기 전반부, 30년도 안 되는 사이에 발생한 양차 세계대전은 거의 5000만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하지만 인류는 여기서 교훈을 얻고 전쟁을 중단하지 않았다.

1910년, 미국 스탠퍼드대 총장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앞으로 인류사회는 국가들이 전쟁 비용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전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라며 전쟁 불가론을 설파했다. 그러나 이런 낙관적 예측과는 상관없이 전쟁은 오늘날의 이라크에서 보이듯 끊임없이 이어진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후 인류가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게 된 뒤 대규모 전 지구적 전쟁은 아직까지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0세기 동북아와 한반도는 제국주의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그 이후의 냉전,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지역전쟁을 끊임없이 겪은 아주 독특한 지역이다. 이런 동북아 지역에 본질적 변화가 발생한 것은 소련의 해체와 중국의 경제적 부흥에 따른 세계정세의 변화다. 소련 해체의 와중에 독일은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유럽은 유럽연합(EU)의 확대를 통한 실질적 대응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냉전체제와 지역전쟁의 위협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이전까지는 별다른 게 없었다.

6.15 이전까지 남북은 공존보다 '언젠가는 상대방이 서로를 공격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냉전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던 이런 강박관념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6.15의 의미는 크다.

이라크 전쟁과 4.15총선에 온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에서도 13일 개성 자남산여관에서 남북한이 개성공단 토지 임차료 문제에 합의해 개성공단 건설의 사실상 마지막 걸림돌을 해결했다. 이제 큰 변수만 없다면 남북한은 총칼을 녹여 농기구를 만들 듯 새로운 협력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라크 전쟁의 와중에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협상을 성공리에 마무리지은 관계자들 만세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