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95>5.부동산 실명제 시행-도입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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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부동산실명제는 올초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도중 「불쑥」 튀어나왔다.물가 문제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대목에서였다.
사실 정부는 94년10월부터 은밀히 당시 경제기획원이 중심이돼 부동산 실명제 준비를 해오던 터였다.하지만 작업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대통령의 입을 통해 발표되자 실무자들은 크게 당황했다.연두기자회견을 TV를 통해 지켜보다 점심 약속을 위해 사무실을 나서던 당시 홍재형(洪在馨)부총리가 깜짝 놀라 도로 사무실에 돌아와 관계자들을 불러 긴급 협의를 가졌을 정도였다.이후 실무 작업에 가속도가 붙은 것은 물론이다.
금융실명제의 완결판으로 불리는 부동산실명제의 필요성에 이제 와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부동산 가격 안정과 투기적 요소의 제거는 근본적으로 토지의 공급을 늘리고 활용도를 높이는 처방이므로 해결해야 하지만,그 제도적인 바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부동산 거래의 실명화라는 점에서다.
그러나 이처럼 타당한 원론에도 불구하고 각론에서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법적인 해석 문제였다.
헌법에 보장돼 있는 사유재산권 보호와 계약 자유원칙에 위배되지 않느냐는 이의가 당장 제기됐다.
타인 명의로 등기를 해두는 부동산 명의신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70~80년 이어져온 관행이며 법원에서도 판례로 인정해오던 터였다.
전경련이나 대한상의등 경제단체와 재계에선 공장 지을 땅 구하기가 어렵게 된다며 반대했다.
이런 부분까지를 세세하게 고려하고 반영하지 못한 채 발표부터덜컥 해 놓은 통에 수많은 시시비비와 지적에 직면한 정부는 결국 2월 들어 별도의 산업용지 원활화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실명전환 유예 기간을 2년 정도는 둬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으나 1년(95년7월~96년6월)으로 결정됐다.
또 초기에는 비교적 많은 예외를 인정하는 쪽으로 틀이 잡혀 있었으나 여론 수렴과 공청회 과정을 거치면서 예외를 최소화하는쪽으로 방향을 크게 틀었다.
예컨대 기업의 공장용지를 빨리 자기 명의로 돌리면 예외를 인정하는 방안도 검토됐다가 여론에 밀리고 말았다.
이처럼 부동산 실명제는 전격 발표이후에도 금융실명제처럼 전격시행된 것이 아니고,공론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곡절을 겪고변형됐다.
또 금융실명법이 사실상 남의 이름 빌리기(借名)를 인정하고 있는 반면 부동산실명법은 이름을 빌린 사람은 물론 빌려 주거나이를 알선한 사람까지 형사처벌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6.27지방선거 이후 금융실명제와 함께 부동산실명제도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 당시 민자당에서 제기돼 부동산실명제는 시행 한달도 안돼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결국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는 많다.
우선 부동산실명제를 한 이상 과거 투기 시대에 만들어진 토지취득과 이용에 관한 규제를 계속 끌고 갈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 갈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다.
종합토지세도 세율 체계를 단순화하고 지나친 누진 구조를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결국 부동산실명제는 아직도 진행중이며 계속 내용 검증을 받고있는 셈이다.
양재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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