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싸워도 일하는 일본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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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총리는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다. 지난해 9월 취임 당시 60%대였던 지지율은 현재 20%대를 밑돌고 있다. 되는 일도 거의 없다. 공기업 개혁을 비롯한 구조개혁은 용두사미에 그쳤다. 경제 회생·공교육 강화 등 산더미처럼 쌓인 정책 과제들은 야당과 기득권층의 저항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다. 야당은 11일 일본 헌정 사상 처음으로 참의원에서 총리 문책 결의안까지 가결시켜 총리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후쿠다 총리의 리더십이 흔들리는 근본 배경은 여당의 국정 혼선이다. 세금·연금·의료 등 세 가지만 예로 들어 보자.

도로 건설 공사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휘발유 잠정세율은 유지시켜 국민의 원성을 샀다. 후생노동성은 5000만 건의 연금기록을 분실한 뒤 납부 사실 입증 책임을 국민에게 돌렸고, 75세 이상 고령자들에겐 충분한 설명도 없이 의료비 부담을 늘렸다. 학생·시민 데모가 극렬했던 1970년대 이전이었다면 벌써 일본 열도가 들썩거렸을 사안들이다.

일본에선 학원 민주화·좌익 학생운동으로 각종 시위가 극렬했던 69년에는 도쿄(東京)대 봉쇄사건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일본은 중요한 문제들은 거리가 아니라 국회에서 처리되고 있다.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다는 평도 있지만 무엇보다 여당과 야당이 국회에서 정책 대결을 벌인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아직 대의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자민당은 12일 자신들이 다수인 중의원에서 총리 신임 결의안을 가결시켜 야당의 총리 문책 결의안에 맞불을 놓았다. 비록 정책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총선 실시 등으로 정국을 뒤흔들기보다는 정책 대결로 풀어 가자는 취지였다.

일본의 여당과 야당은 매번 다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국가공무원법 개혁안과 아이누족 원주민 인정 결의안을 초당적으로 협력해 통과시켰다. 싸우면서도 할 일은 하자는 것이다. 일본 정치에는 세습·파벌 등 부정적인 단어가 따라 다닌다. 그러나 많은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한 달 넘게 고생하면서 서로 대립·분열하도록 자극하거나 방관하지는 않는다. 특히 국회를 내팽개치는 일은 거의 없다.

김동호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