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소증 세대와 촛불 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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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는 1970년대에 실존했던 흑인 범죄조직 두목 프랭크 루커스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 도입부에 주인공 프랭크(덴젤 워싱턴)가 보스로 섬기던 범피와 도심 번화가를 거닐던 중 범피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범죄자였지만 범피는 나름대로 선행도 베풀어 할렘가 흑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존재였다. 그가 죽기 전에 급속도로 대형화·체인화하는 점포들에 대해 쏟아놓는 푸념이 재미있다.

“이런 식의 개발은 미국의 큰 문제야. 모든 게 나날이 대형화되잖아. 길모퉁이 가게는 수퍼마켓이 되고, 과자 가게는 맥도널드가 되고, 여긴 초대형 할인매장이 됐어. 상인의 자부심이 실종됐어. 인간미도 사라졌고. 무슨 권리로 상권을 싹쓸이하느냐고… 정말 큰 문제야. 가게 안에 주인이 있어야 칼 들고 돈을 뜯지.” 범피는 주인은 안 보이고 온통 종업원뿐인 할인매장 안에서 탄식을 거듭하다 숨을 거둔다.

‘아메리칸 갱스터’의 이 대목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촛불시위를 떠올렸다. 도대체 주인은 코빼기도 볼 수 없는 대형 점포. 강도가 느끼는 당혹감은 어려운 말로 하면 일종의 소외(疎外) 현상이다. 청계천과 서울광장에 모인 촛불시위대도 “가게에 주인이 있어야 말이라도 걸어 보지”라며 탄식하다 하나둘 집을 나선 것 아닐까. 그들에게 ‘가게’는 국회요, 청와대요, 정부다. 대의민주주의 잘하라고 투표하고 권한 주어 내각도 꾸미게 했는데, 바꿔 말하면 ‘상권을 싹쓸이’해 몰아주었는데 하는 짓이 영 시답잖은 것 아니겠는가. 국민은 강도가 돈을 탐내는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간절하게 건강과 안전한 먹거리를 원하는데 종업원들만 나서서 딴소리를 늘어놓으니 화가 북받친 것 아닌가 말이다.

수십 개 단체에 이름 걸어놓고 각종 시위마다 개근하는 ‘꾼’들도 보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촛불시위는 일반 시민이 주축이었다. 더 좁히면 중·고생을 포함한 젊은 세대가 다수였다. 그러므로 ‘시위 행렬의 앞에 서면 선동 세력, 중간에 끼이면 핵심 세력, 뒤에서 따라가면 배후 세력’이라는 최근 유머는 정곡을 찔렀다. 쇠고기 정국을 놓고 대의정치의 실종이니 생활정치의 등장이니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지만, 나는 ‘소증(素症) 세대’와 ‘촛불 세대’의 인식 차이도 사태의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소증은 푸성귀만 너무 먹어 고기가 먹고 싶어지는 증세다. 아무리 강부자 내각이라지만 노무현 정부보다 한층 연로해진 현 정부 인사 상당수는 자랄 때 소증을 경험했을 것이다. 내남없이 가난했고 보릿고개가 매년 찾아오던 시절이었다. ‘소증 나면 병아리만 쫓아도 낫다’는 속담에 다들 공감하던 때였다. 내가 아는 한 장관은 시골에서 대도시로 전학간 뒤 난생 처음 자장면을 먹고 된통 설사를 했었다. 누구보다 이명박 대통령 본인이 적빈(赤貧)의 생생한 증언자다. 초등학교 때도 굶기를 밥먹듯 하면서 김밥·성냥 장사를 했고, 밀가루떡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팔다 헌병한테 걸려 두들겨맞기도 했다.

성장기의 원(原)체험은 처지 변화와 상관없이 오래 영향을 끼친다. 꿀꿀이죽·존슨탕으로 기갈을 막던 세대에 먹거리는 종류를 막론하고 ‘없어서 못 먹지’다. 그런 체험이 쇠고기 도입 협상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것 아닐까. 꽁보리밥을 쌀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먹던 세대와 웰빙 음식으로 즐기는 세대의 먹거리관(觀)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서울광장과 청계천 공사를 잘 해놓았다. 촛불 세대가 소증 세대에 말을 건넬 공간을 마련한 셈이니까. 나는 촛불시위를 대의민주주의의 실종이 아닌 보완 수단으로 이해한다. 이왕이면 정부가 나서서 광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움츠리고 주눅들 이유가 없다. 사회적 이슈는 쇠고기 이후에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주말이면 해당 장관이 나와 촛불 세대와 대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많은 소증 세대의 추억일랑 일단 접어두자. 어차피 시간은 촛불 세대 편이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