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시사적 소재 "슬픔의 노래 헨릭 구레츠키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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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지울수 없는 과거의 짐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어쩔 수없는 운명에 대한 슬픔.그 슬픔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에 대한 슬픔….
이런 면에서 80년 5월의 광주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슬픔의 공통분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단 「열린무대-동.수」가 서울 강강술래소극장에서 공연중인 『슬픔의 노래-헨릭 구레츠키를 아십니까』(정찬 작,김동수 연출)는 바로 이 「슬픔」을 화두로 삼은 무게있는 작품이다.
시사적 소재를 다룬 경우 구태의연한 구호성 작품을 먼저 떠올리기 쉬운 풍토에서 80년 광주항쟁을 인간의 내면적 고통에 초점을 맞춰 차분히 조망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특히 주목된다.
폐허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회색톤의 무대는 역사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내면세계를 재생하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무대는 광주도 서울도 아닌 폴란드 아우슈비츠의비극을 안고 있는 곳이다.본래 「축복받은 땅」이란 뜻을 지닌 아우슈비츠는 「빛고을」이란 이름의 광주와 닮은 꼴이다.
작품은 언론사 기자인 유성균이 작곡가 헨릭 구레츠키를 취재하기 위해 폴란드로 출장가 그곳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친구 「민영수」와 연극배우 「박운형」을 만나면서 전개된다.
『아우슈비츠는 내 내면과 닮았다』며 유성균의 아우슈비츠 방문에 난색을 표했던 박운형의 내적 갈등은 결국 세사람이 함께 한술집에서 충격적인 모습으로 폭발한다.
박운형은 광주에서 자신이 가해자였음을 눈물과 광기의 절규로 고백한다.
올해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원작의 탄탄한 구성과 의식의 통점(痛點)을 찌르는 대사들이 잔 기교를 부리지 않은 무대연출을 통해 더욱 돋보인다.
또 광주의 어두운 죄의식을 섬뜩하고도 가슴뭉클하게 표현한 박지일의 열연은 긴 여운을 남길 만큼 인상적이다.
연출가 김동수씨는 『가벼움을 무기로 내세운 최근 연극 풍토에반기를 들고싶어 이 작품에 매달렸다』며 『작품의 호흡이 다소 길지만 관념적 대사를 사색으로 따라잡는 묘미가 있다』고 말했다.내년1월28일까지 공연.762-9318.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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