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죄와 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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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 품팔이 농사꾼(傭耕)이 밭갈이하다가 동료들에게 말했다.『내가 부귀를 얻으면 너희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이를 들은 동료들이 크게 비웃자 『아아! 제비와 참새들(燕雀)이 어찌 큰 기러기(鴻鵠)의 뜻을 알리오』라며 그는 길게 탄식했다 .이들 품팔이 농사꾼들이 수자리에 징발되어 가다 큰비를 만나 정한 기일에 도착하지 못하게 되었다.당시 법으론 실기(失期)하면 사형이었다.당황해하는 동료들을 품팔이꾼은 선동해 반란을 일으킨다.
이 품팔이 농사꾼이 바로 중국 진(秦)제국 을 멸망시킨 진섭(陳涉)이다.
중국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그의 『사기(史記)』에서 별볼일 없는 한 품팔이 농사꾼의 전기를 자세히 적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나라 정치가 잘못되면 하찮은 품팔이 노동꾼에 의해서도제국(帝國)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 는 것이다.어떤 위대한 권력도,잘 무장된 군대도 정치를 잘못하면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본보기로 2,000년이라는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역사란 기억의 문서화를 통해 오늘 우리 삶의 바른 길을 택하자는데 1차 적 목적이 있다.
지금 역사 청산작업이 한창이다.몇몇 군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군사반란과 반인륜적 학살사건을 새롭게 규명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다.법을 고쳐서라도 반란자들을 처단해야 하고 엄격한 응징으로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있는가 하면,과거 를 청산하되법의 테두리 안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온건론이 맞서고 있다.우여곡절을 거쳐 두명의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고 지금 우리는 15년전 반란과 학살사건을 새롭게 심판하는 매우 중대한 고비를맞고 있다.역사적 심판과 사법적 심 판,과거 청산과 현재의 삶에서 갈등을 일으킨다.역사 단죄를 냉엄히 하자니 현실의 법이 맞지 않고,과거 청산에 몰두하자니 오늘의 삶에 주름이 간다.어느쪽을 택해야 할 것인가.
이럴 때를 생각해 나온게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구다.E H 카라는 영국 역사학자가 이 말을 쓴 데는 연유가 있다.20세기 초만 해도 역사학자들간엔 그치지 않는 논쟁이 있었다.역사란 과거 사실이 진실로 어떠 한가를 규명하는 과학적 작업이라는 주장,역사란 현재 역사가의 주관적 인식과 판단에 따라 쓰이는 주관적 작업이라는 논쟁이었다.이 논쟁을종식시킨 중용적 정의가 과거도 중요하고 현재도 중요하다는 중간입장이다.
지금 진행중인 역사 청산작업도 따라서 이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과거 사실이 진실로 어떠했던가를 따지고 파고 들기 시작하면 우리는 과거의 미로찾기라는 역사놀이에빠져들 위험이 있다.오늘 우리 경제가 큰일이니 과거는 덮어두자고 할 때 역사의 진실과 정의는 영원한 미제(未濟)로 남는 과오를 저지른다.과거청산의 상한.하한선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일 언론인 테오 좀머가 5.18특별법에 대해 충고어린 기고문을 보냈다(본지 12월2일자).그는 보복과 처벌만으로 과거를극복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했다.5년전 독일 통일후 옛동독정부의통치범죄를 둘러싸고 3만7,000건의 조사가 벌어졌으나 판결은80건으로 끝났다.정치 책임자들은 대부분 석방되었고 잔챙이만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극악무도한 주범은 최후까지 추적하되 과거 극복의 핵심은 불행했던 지난 일을 「똑바로 기억하는 행위」라고 했다.보복과 처벌의 광기(狂氣)속에서 정의의 감정은 쉽게 소멸되고 망각의 커튼은 빨리 내려진다고 경고했다.벌에 열중하다간 죄를 잊어버린다.
법정과 수사집단,급조된 재판소는 기억을 관장하는 곳이 못된다.
배우고 기억하는 과정이 처벌보다 중요하고 이것이 과거 청산의 교훈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2,000년을 두고 하찮은 반란자 진섭을 기억해야 하듯 12.12와 5.18의 잔혹행위를 영원히 기억하는게 우리의 역사적과제다.과거와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현재와의 대화는 더욱 중요하다.역사적 심판은 처벌에 열중하는 것이기보다는 오랫동안 기억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어제의 심판을 해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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